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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50억 줄테니 같이 연구하자" 中대학 수상한 파격 제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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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반도체·디스플레이·이차전지 등 첨단기술 관련 국내 대학 연구진이 중국 대학으로부터 파격적인 공동 연구 제안을 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해외 대학과의 협력은 일반적이지만, 국내 연구·개발 단계에서의 보안 기준과 가이드라인이 모호해 핵심 기술의 유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5일 중앙일보가 첨단 기술 관련 학과를 운영하는 국내 주요 대학 10여 곳을 확인한 결과, 상당수 대학이 최근 몇 년 새 중국 대학에서 연구 협력 제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식적으로 양국 대학 간 공동 연구나 업무협약(MOU) 체결을 제안하거나, 학회 인맥 등을 이용해 교수진에 직접 접촉하는 식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반도체 분야를 연구하는 한 공과대학 교수는 "1년에 한두 번씩 아는 중국 교수로부터 전화나 e메일로 공동 연구 제안을 꾸준히 받았다"며 "어느 정도 수준으로 협력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서 연락을 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계약해 학과를 운영 중인 한 대학의 관계자도 "중국 대학이 첨단 기술 관련 특정 학과만을 대상으로 MOU를 제안하는 경우가 몇 년 사이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이들 중국 대학이 거액의 연구비 지원 등 조건을 제시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교류만 하면 연구비뿐 아니라 연구진 월급까지 부담하겠다는 대학도 나왔다. 국내 연구진으로선 지원 규모도 크고, 국가 연구·개발(R&D) 사업보다 지원받는 절차가 간단해 솔깃할 수밖에 없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교수도 "중국에서 제안서를 보내며 좋은 기술이 있으면 50억원까지 지원하겠다고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중국 대학이 연구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협력 과정에서 주요 기술의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특히 최근 미국의 각종 무역 제재 등으로 중국의 '기술 굴기'가 막히면서 새로운 활로 확보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대학에서 당장 상용화할 연구를 하진 않지만, 교수 중엔 기업에서 일하거나 기업과 공동 과제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아 (대학 연구기관에) 국내 기술 노하우가 집적돼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디스플레이 관련 학과의 한 교수도 “산업 기술은 정교한 실험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는 특성이 있어 실패한 실험 내용도 공유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고 전했다.

문제는 기술 유출 우려다. 현행법(부정경쟁방지법 및 산업기술보호법)상 대학 등 연구기관의 장은 산업기술 관련 국가 R&D 사업을 수행할 경우 개발성과물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학 연구 성과물을 외국으로 유출할 경우 1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억원 이하의 벌금을 물릴 수 있다. 하지만 대학 연구 단계에서 개발 중인 기술이 산업기술이나 영업 비밀에 해당하는지 기준이 모호하다. 김서곤 법무법인 로백스 기술보호센터 부센터장은 "대학별로 보안 관리 예산이나 전문 인력이 부족해 개별 연구실 단위에서 보안관리가 이뤄지지 않는 문제점도 있다"며 "공동연구 시작 단계에서 연구성과물의 귀속, 비밀 보호 등을 구체적으로 확정하고 가야 추후 발생할 위험에 대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가이드라인이 명확하지 않아 연구 현장에서 느끼는 혼란도 크다. 산업기술이 완성되기까진 수많은 기초 연구가 선행돼야 하는데, 해외 대학과의 교류를 무작정 경계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이병훈 교수는 "기초 연구 단계에선 제약을 덜 두고, 산업 기술에 가까울수록 엄격히 해야한다"며 "명확한 규정이 없어서 기술 유출 교수가 될 수도,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국가 기술 안보를 유지하면서 학문 교류를 원활히 하기 위해선 명확한 규정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에선 지난 2022년 2월 연구 시 외국 자본 지원 사항을 공개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우리 정부도 지난해부터 과학기술부·국정원을 중심으로 연구·개발 단계에서의 지침 마련에 나섰다.

선인경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지속가능혁신정책연구단장은 "연구인력 감소 위기 속에서 연구생태계의 국제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단순히 산업기술 유출을 막자는 규제 관점으로만 접근할 게 아니라 연구자를 보호하고 위험을 예방하는 관점에서 연구보안 인식을 제고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항배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연구 보안 전문 조직과 인력 양성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구멍 뚫린 K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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