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 피고인 모두 무죄.”
5일 이재용(56)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 부당승계 의혹’ 1심에서 전부 무죄를 선고받은 직후 법정에서 입가에 도는 은은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법원에 들어섰던 1시간 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25-2형사부(부장 박정제·지귀연·박정길)는 이 회장이 자본시장법 위반,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지 3년 5개월 만의 선고 공판에서 공모 혐의를 받는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 실장 등 삼성그룹 핵심 관계자 10여명 등을 포함해 전부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검찰은 징역 5년과 벌금 5억원을 구형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회계부정·부당합병 관련 1심 무죄를 선고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스1
이재용 삼성물산·제일모직·삼바 1심 무죄
이 회장은 재판 시작 약 20분 전인 오후 1시40분쯤 제네시스 구형 EQ900 차량을 타고 검은 정장에 흰 셔츠, 넥타이 차림으로 법원에 도착했다. “주주 손해 끼친 적 없다는 입장엔 변함 없나” “불법 승계 논란 피하고자 삼성바이오로직스 가치를 높인 건 아닌가” 등을 묻는 취재진 질문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오후 2시쯤 재판부가 법정에 들어오자 이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부를 향해 인사했다.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착석한 그는 깊은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 재판부의 “이재용 피고인” 출석 확인에도 이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 회계부정·부당합병 관련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그러나 50여 분에 걸친 선고 끝에 피고인석과 검사석의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됐다. 검찰의 공소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 “증거능력이 부족하다” 등 일색으로 채워졌고, 재판 40분쯤이 흐른 무렵부터는 검사석 분위기가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검사들이 콧등을 긁적이거나 눈가를 짚고, 필기하던 손을 멈추고 물을 마시거나 턱을 문지르는 빈도가 잦아졌다.
반면 눈을 질끈 감거나 고개를 숙인 채 선고를 듣던 피고인석에는 은은한 안도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무죄 선고 직후 이 회장은 살며시 미소 지은 뒤 앞에 놓여있던 물을 들이켰다. 재판부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법정 서기에게 다가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법정 밖을 나선 피고인들은 서로 환히 웃으며 수고했다며 등을 두드리고 악수를 나눴다. 이 회장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말없이 법정을 떠났지만, 얼굴에선 홀가분한 기색이 느껴졌다.
이날 이재용 측 변호인단은 “이번 판결로 삼성물산 합병과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가 적법하다는 점이 분명히 확인되었다”며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신 재판부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짧은 입장을 밝혔다.
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금융정의연대 등 노동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법원삼거리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부당합병 1심 선고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이재용 회장에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한동훈·이복현 수사…“사법리스크 일단락 되길”
삼성 부당합병·부정회계 의혹 수사는 국정농단을 계기로 촉발됐다. 이 회장(당시 부회장)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위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접촉한 게 알려지면서다. 의혹 자체는 두 회사의 합병 직후인 2015년부터 있었다. 삼성물산 지분이 없던 이 회장이 제일모직의 흡수합병으로 삼성물산 지분 16.4%를 확보한 최대주주가 됐기 때문이다.
검찰은 “합병 논란의 재점화를 막기 위한 것(지난해 11월 결심공판)”으로 판단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등을 포함해 2018년 7월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이 회장이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승진했던 2012년 12월 무렵 승계 계획안 ‘프로젝트-G(Governance·지배구조)’가 완성됐고, 이에 따른 에버랜드 사업조정과 제일모직 상장 등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2024년도 금융감독원 업무계획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 원장은 이날 자신이 부장검사 시절 기소한 이재용 회장의 1심 선고 관련 발언도 했다. 연합뉴스
수사는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이끌었다. 각각 서울중앙지검 지검장, 3차장, 경제범죄형사부장을 맡았던 때다. 세 사람은 국정농단 특검팀에서도 호흡을 맞췄던 사이다.
이복현 원장은 이날 선고 전 금감원 출입기자들과 질의응답에서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삼성전자, 삼성그룹 위상에 비춰 이번 선고가 소위 사법리스크 일단락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삼성 그룹과 이재용 회장께서 경영 혁신, 국민 경제 발전을 위해 족쇄가 있었다면 심기일전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건희 별세·법정구속·맹장수술…다사다난 5년
수사와 재판이 거듭된 5년 여간 이 회장에겐 우여곡절이 많았다. 2020년 9월 이 사건으로 기소된 지 한달 여 뒤인 10월 15일 아버지 이건희 전 회장이 사망했다. 2021년 1월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으로 2년 6개월 법정구속이 선고됐고, 7개월 뒤 광복절을 앞두고 가석방 됐다. 그해 3월로 예정됐던 합병 의혹 첫 공판은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이 회장이 3월 19일 급성 맹장수술을 받게 되면서 연기됐다.
수술 약 한달 뒤 삼성서울병원을 퇴원한 그는 구치소로 돌아갔고, 그해 4월 22일 첫 공판에 출석해 “검찰이 제기한 공소사실을 인정하느냐”는 재판장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다 “인정할 수 없다”고 짧게 답변했다.
지난 2021년 1월 18일 이재용 삼성전자 당시 부회장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그는 이날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의 첫 특별사면이었던 2022년 광복절 특사에서 ‘복권’으로 5년 취업 제한이 풀려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그해 10월 삼성전자 회장에 취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