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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선

모래성 같은 ‘저 PBR’ 테마 장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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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논설위원

하현옥 논설위원

 쥐구멍에도 볕이 든다. 이른바 ‘무거운 주식’으로 소액주주의 속을 꽤 태웠던 ‘저(低) PBR 주’가 때아닌 주목을 받으며 오름세를 타고 있다. 연초 비실대던 코스피가 최근 2600선을 회복한 것도 ‘저 PBR 주’의 약진 덕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정부가 이달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을 발표하기로 하며 벌어진 다소 ‘낯선’ 광경이다.

 PBR은 주가순자산비율이다. 시가총액(주가)을 순자산으로 나눈 것으로, 기업 자산 대비 주가의 적정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다. 낮을수록 저평가된 것으로 여겨진다. PBR 1배 미만은 회사가 보유한 자산을 다 팔고 사업을 청산한 가치가 주가보다 높다는 의미다. 기업이 바로 문을 닫더라도 투자자 입장에서는 손해가 없는 셈이다. 망하지 않을 회사를 가려내는 판단 지표다.

 PBR이 낮으면 기업 재정이 안정됐다는 뜻이다. 금융사 평가에 PBR이 유용한 이유다. 그렇지만 PBR이 너무 낮으면 자산은 많은 데 수익을 못 내는 상황이다. 부동산 자산만 많거나 주주에게 배당하지 않고 돈을 쌓아두는 경우도 해당한다.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을 수도, 미래의 이익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상속세 부담으로 주가를 낮게 유지하려다 보니 PBR이 과도하게 낮아진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여러 이유로 그동안 시장에서 PBR이 낮은 종목은 투자 기피 대상이었다. 그런데 ‘저 PBR 주’의 몸값이 뛰는 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팔을 걷고 나선 정부 덕이다. 강세를 이어가는 미국과 일본보다 탄력을 받지 못하는 한국 증시의 저평가 상황을 풀기 위해 금융당국은 상장사 업종별 PBR 비교 공시를 할 계획이다. PBR 1배 미만 기업을 공시해, 기업이 자체적으로 주가를 올릴 방안을 내놓게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코스피의 PBR은 0.9배 수준으로, 미국 평균(4.6배)보다 떨어지고 일본 닛케이 지수(1.4배)보다도 낮다.

증시 저평가 해소하려 PBR 공시
주주환원 통해 주가 상승하려면  
자사주 소각·상속세 등 개선 필요

 정부가 ‘저 PBR 주’ 체질 개선에 나서는 건 일본의 성공 사례 때문이다. 일본거래소그룹(JPX)은 지난해 PBR 1배 미만 상태가 지속하면 상장폐지 목록에 오를 수 있다는 경고까지 하며 ‘저 PBR’ 기업과 전쟁에 나섰다. 기업은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배당을 확대해 주가를 끌어올렸고, 도요타 자동차 등 169개 기업의 PBR이 1배를 넘어섰다. 기업 실적 개선과 엔저 등에 더한 이런 분위기 속에 닛케이 지수는 지난해 28%가량, 올해 들어 8% 정도 상승했다.

 일본 기업이 순식간에 주주 친화적으로 돌변한 게 아니다. PBR을 높이려면 주가가 오르거나, 자산이 줄어야 한다. 주가가 오르며 PBR이 높아지면 좋지만, 주가 올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소각과 같은 주주환원책 등을 통해 자산을 줄이는 게 ‘저 PBR’ 해소에 용이한 방법일 수 있다. 한국 기업도 ‘저 PBR’에서 탈출하려면 주주환원책을 쓸 수밖에 없다는 기대감에 ‘저 PBR 주’로 투자가 쏠리는 것이다.

 한국 증시의 저평가 요인 중 하나인 ‘저 PBR’에 손을 대겠다는 금융당국의 방향성은 적절하다. 하지만 ‘저 PBR 주’가 이끄는 최근의 시장 흐름은 위태롭다. ‘대통령이 찍어준 테마주’라며 ‘묻지마 투자’의 양상을 보여서다. “투자자들이 수년간 가치주를 패대기치더니, 이번에는 저 PBR 주식을 마치 초전도체 테마주처럼 매수하는 모습”이라는 지적(이웅찬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대로다.

 불붙은 테마 장세에 투자자는 서둘러 움직이고 있지만, 제대로 성과를 내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금융당국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 방안 도입을 보류했다.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부추기는 등 경영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기업의 우려를 반영해서다. 주주환원에 필수적인 자사주 소각부터 제동이 걸린 것이다. 기업에 과도한 부담이 되는 상속세 문제도 풀어야 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나쁜 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PBR 개선을 위해 기업이 주가 부양에 적극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제도적 뒷받침 없는 ‘저 PBR’ 체질 개선은 오히려 시장의 왜곡과 투자자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 ‘저 PBR 주’와 코스피로 자금이 쏠리며 ‘고 PBR 주’인 성장주와 코스닥은 이미 충격을 받고 있다. ‘저 PBR 주’ 폭탄 돌리기가 나타나면 과도한 기대감에 ‘저 PBR 주’를 담았다가 발목 잡힌 투자자를 양산할 수도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제도를 마련하고 ‘저 PBR’ 수술에 나서야만 총선용이 아닌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정책이라는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