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대신 평화…'고딩엄마' 북아일랜드 첫 민족주의자 총리 됐다 [후후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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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에 임신‧출산으로 학교에서조차 큰 기대를 받지 못했던 소녀가 3일(현지시간) 영국령 북아일랜드의 총리로 임명됐다. 주인공인 미셸 오닐(47)은 ‘영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정당인 신페인당 소속으로, 북아일랜드 역사상 이 진영에서 총리를 배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오닐 총리는 이날 총리직 수락 연설을 통해 “오늘은 새로운 새벽을 맞은 역사적인 날”이라며 “우리의 부모, 조부모 때는 상상조차 못했던 순간이 왔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모든 북아일랜드인을 대표하는 첫번째 총리가 되겠다”며 국민 통합을 강조했다.

3일(현지시간) 북아일랜드 총리에 임명된 신페인(Sinn Fein) 정당 소속 미셸 오닐이 스토몬트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북아일랜드 총리에 임명된 신페인(Sinn Fein) 정당 소속 미셸 오닐이 스토몬트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영국에서 독립' 주장 정당, 첫 총리 배출

신페인당은 지난 2022년 5월 자치의회 선거에서 득표율 29%로 사상 처음 의회 다수당을 차지했다. 총리 지명 권한을 확보했지만, 친영(親英) 성향의 연방주의 정당인 민주연합당(DUP)과의 연립정부(연정) 구성이 무산되면서 자치정부 출범이 지연돼 왔다.

북아일랜드는 1919~21년 영국과 전쟁을 치른 뒤 자유국으로 독립한 아일랜드 공화국과 달리, 스코틀랜드·웨일스·잉글랜드(브리튼섬 위치)와 함께 영국 연합왕국(UK) 구성국 중 하나다. 하지만 1998년 북아일랜드의 8개 정당이 영국·아일랜드와 맺은 벨파스트 평화협정으로, 광범위한 입법권과 행정권을 인정받고 있다. 다만 해당 협정에 따라, 자치정부 구성시 반드시 민족주의 정당과 연방주의 정당이 연정을 이뤄야한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DUP는 영국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이후 본토인 브리튼섬(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가 있는 섬)과 아일랜드 섬 사이에 교역 장벽이 생긴 것에 불만을 품고 연정을 거부해왔다. 하지만 최근 영국 중앙정부와 무역 우려를 해소하는 방안에 합의하면서 연정에 복귀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730일 만에 북아일랜드에 행정부와 의회가 작동하게 됐다”고 전했다.

과격 투쟁 대신 진보 색채 강조

1977년생인 오닐 총리는 아일랜드 남부 해안 지역인 코크주(州) 출신으로, 벨파스트 협정 이후 정치에 입문한 첫 세대다. 그의 아버지 브랜던 도리스는 과거 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며 분리주의 무력 투쟁을 벌이던 북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일원으로, 수감된 전력도 있다. 이후 신페인당에 가입해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오닐 총리의 사촌 토니 도리스 역시 IRA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1991년 영국 공군특수부대(SAS)에 의해 살해됐다.

뼛속부터 민족주의자이지만, 오닐 총리는 무장 투쟁 대신 평화를 강조해왔다. 지난 202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했을 때 조의를 표했고, 찰스 3세 국왕의 대관식에도 참석했다. AFP는 이같은 행보는 신페인당이 IRA의 정치 조직이었던 과거에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전했다.

 신페인당의 미셸 오닐이 지난해 5월 6일 영국 찰스 3세 국왕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AFP=연합뉴스

신페인당의 미셸 오닐이 지난해 5월 6일 영국 찰스 3세 국왕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AFP=연합뉴스

오닐은 과격함을 버리고 좌파 사회주의와 진보적 색채를 강조해왔다. 2016년 오닐이 보건부 장관이 됐을 때 가장 먼저 내린 조치는 동성애자 및 양성애자 남성의 헌혈 금지 조치 해제였다. 또 2021년 DUP와 얼스터연합당이 손잡고 ‘낙태 불법화’를 시도했을 때는 “이들의 행동이 부끄럽다”고 비난했다.

지난 선거에서도 오닐 총리는 ‘아일랜드와의 통일’이라는 민족주의적 열망을 내세우는 대신, 브렉시트 충격 이후 급등한 물가에 대응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정책 방향을 강조했다. WP는 “오닐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이전과 다른 정치 스타일”이라면서 “젊은 층의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고 전했다.

16세 출산…젊은층과 공감 포인트

특히 그가 16세에 첫딸 시얼샤를 출산한 경험을 자주 언급하는 것도 젊은이들과의 공감 포인트가 되고 있다. 그는 “아이를 낳자, 세상은 나를 상자에 가두고 ‘미혼모’라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가톨릭 학교를 다녔던 오닐은 “임신·출산을 경험하면서 대다수 교사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모두 불친절해졌다”면서 “나 자신이 전염병 환자라도 된 것 같았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 문 앞에 앉아 자주 울었다”고도 전했다.

그는 “이런 경험이 나를 더 강한 여성으로 만들었다”면서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시험 공부를 한다는 것의 의미, 삶이 뜻밖의 어려움에 부닥친다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강조해왔다. 그의 첫딸 시얼샤(28)가 지난해 아이를 출산하면서 오닐 총리는 할머니가 됐다. 그에게는 23세 둘째 아들 라이언도 있다.

 신페인 정당에서 배출한 북아일랜드 최초의 총리 미셸 오닐이 3일 스토몬트에 있는 북아일랜드 국회의사당에 들어서고 있다. AFP=연합뉴스

신페인 정당에서 배출한 북아일랜드 최초의 총리 미셸 오닐이 3일 스토몬트에 있는 북아일랜드 국회의사당에 들어서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날 북아일랜드 부총리로는 DUP의 에마 리틀-판겔리가 임명됐다. 북아일랜드 연정 특성상 총리와 부총리의 권한은 동등하다. 하지만 아일랜드 정치 평론가인 핀탄 오툴은 “둘의 권한은 동등하지만 신페인에서 최초의 총리가 배출됐다는 상징성은 너무나 명백하다”면서 “북아일랜드는 1921년 ‘언제나 영국 안에 머물겠다’는 친영 연방주의자들의 지배력 보장을 위해 탄생했지만, 오닐 총리 등극은 이 프로젝트의 종말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평가했다.

북아일랜드 총리에 지명된 신페인당의 미셸 오닐과 부총리 지명자 민주연합당 엠마 리틀 펜겔리. AFP=연합뉴스

북아일랜드 총리에 지명된 신페인당의 미셸 오닐과 부총리 지명자 민주연합당 엠마 리틀 펜겔리. AFP=연합뉴스

한편 아일랜드계로 잘 알려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오닐 총리의 임명에 축하 메시지를 전하고 북아일랜드 의회 복원을 환영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이는 중요한 발걸음”이라면서 “지난 수십년 간의 큰 진전을 지속하는 연정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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