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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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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과거의 일들을 곱씹는 사고 과정을 심리학에서는 ‘반추(rumination)’라 합니다. 좋았던 기억을 곱씹기도 하지만 대개는 후회스러운 경험을 들여다보는 부정적 반추(brooding)가 많습니다. 성숙한 자기반성과는 다릅니다. 대체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슬픔의 원인을 곱씹고, 이 상황의 의미를 찾아 헤매느라 모든 순간을 곱씹고, 내가 달리 행동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곱씹기를, 여러 달 여러 해 반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힘든 감정은 잠시 뒤로 밀려납니다. 그렇게 반추는 몹시 매력적인 도피처가 됩니다. 그러나 잠시 뿐입니다. 반추는 우리를 생각의 미로에 가두어 어떤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게, 어떤 행동을 하지도 못하게 묶어버립니다. 더욱이 반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지난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증폭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최근 많은 연구는 기분장애와 불안장애,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불면증 등 광범위한 정신건강 문제의 위험요소로 반추를 꼽습니다.

과거 곱씹으며 생각 미로 빠지면
기분장애 등 정신건강 위험해져
반추 말고 자신부터 위로해주길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유전적 요인들도 분명 있지만, 반추는 여러 상황에 놓이며 후천적으로 익힌 습관입니다. 일례로,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통제하고 확인하려 드는 이들로부터 원치 않게 영향을 받았다면, 거듭된 반추를 통해 여러 경우의 수에 대해 완벽한 통제와 대비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게 됩니다. 모든 사건에는 의미가 있고 여러 문제 간 분명한 연결 지점이 있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모든 상황을 복기하고 관계성을 분석하는 반추를 합니다.

혹은 주변으로부터 오랫동안 부당하게 비난받고 정서적으로 학대받아온 분들의 반추는 매번 자기 비난과 비현실적인 죄책감으로 끝이 납니다. 불행의 모든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사람 사는 것이 작은 민폐냐 큰 민폐냐의 차이일 뿐인데, 자기 존재는 모든 순간 민폐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찌르는 반추를 합니다.

개인의 결함과 우울은 ‘극복해야만’ 하며 우리는 ‘행복해야만’ 한다는 메시지들도 반추에 영향을 미칩니다. 2018년 진행된 한 연구에서는 ‘할 수 있다’는 식의 동기 부여 포스터를 곳곳에 붙여두고 행복과 웰빙에 대한 자기계발서를 곳곳에 비치한 ‘해피 룸’ 환경에 연구참여자들을 초대했습니다. 아무런 메시지가 없는 환경에 비해 해피 룸의 참여자들은 과제 수행 실패 이후 자기 실패의 원인에 대해 더 오래 반추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더 많이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반추는 각 사건이 나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곱씹는 것에만 머물러 내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실제로 반추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자기에 대한 생각을 담당하는 후대상피질과 설전부라는 뇌 영역이 유독 과잉 활성화되고 다른 뇌 영역과는 소통하지 못하는 특성을 보입니다. 안테나가 안으로만 향하니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합니다.

반추 끝에 남는 것은 ‘왜 상황이 지금 이 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한 다채로운 자기 비난, 그리고 ‘뭘 해도 그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닫힌 결말뿐입니다. ‘한다고 했는데도 결국 그 지경이 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은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줍니다. ‘뭘 해도 소용없어.’ 그리고 그사이 잊혔던 나의 감정들은 나에게 복수를 준비할 것입니다. 그렇게 돌보아주지 않은 작은 우울이 이자가 붙어 큰 우울이 되어 돌아옵니다.

이런 분들께 개인적으로 즐겨 드는 비유는 망해버린 된장찌개입니다. 공들여 만들던 된장찌개가 그만 끔찍하게 망해버리는 날도 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서서, ‘왜 망했지?’ ‘아, 왜 망했지?’ ‘왜 망한 거지?’를 오십 년을 고민해도 된장찌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된장찌개는 개수대에 버리고, 이제부터는 얼른 김치찌개를 끓이면 됩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된장찌개가 아니어도 됩니다. 내 인생에 아주 그렇게 중요한 찌개가 아닙니다. 그게 나의 인생을 책임지는 지혜로운 방법이고 내가 지향하는 가치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어떤 일은 실은 아무 의미 없이 일어납니다. 우연한 상황으로, 혹은 상대방의 사정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백번 양보해 내 탓이 있었대도, 그 일로 제일 괴로운 건 지금 나 자신입니다. 내게 슬픔과 분노가 오고 있으니 나를 먼저 위로해 주세요. 나의 감정들이 알려주는 지혜를 찾아내세요.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아꼈구나. 내가 그 시간을 사랑했구나. 앞으로의 내 삶의 방향이 비로소 또렷해집니다. 나를 멈추게 하고 나를 찌르는 서사를 매 순간 그렇게 적어 내려가지 말아요. 없는 의미를 만들려 하지 말아요. 아주 뭐 그렇게 대단히 행복해 지려고도 말고, 그냥 반추하던 에너지의 반만 들여서 김치찌개나 끓여 먹고, 집도 좀 치우고, 다시 맛있는 커피도 한잔했으면 좋겠습니다. 잘 들여다보면 실은 지금의 생도 이미 상당히 웃기고 더없이 쓸 만합니다. 그러니까, 그 일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