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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라는 용어가 편견 키워요" 17년째 앓아도 일하는 이 사람 [치매와의 공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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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마흔 다섯에 ‘인지증’(認知症·치매의 일본식 명칭) 진단을 받았다. 책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약속을 깜빡하는 등의 실수가 있었지만 치매란 생각까지는 못했다. 어느 날, 전날 사서 넣어둔 디저트를 먹으려 냉장고를 열었는데 안 보였다. “딸들에게 ‘너희가 먹었니?’ 물으니 ‘어? 엄마가 아침에 먹었잖아?’ 하더라고요. 내 인지 기능에 문제가 생겼구나, 그때 느꼈죠."

'일본 인지증 본인 워킹그룹 네트워크(JDWG)' 후지타 가즈코 대표. 이영희 특파원

'일본 인지증 본인 워킹그룹 네트워크(JDWG)' 후지타 가즈코 대표. 이영희 특파원

사단법인 ‘일본 인지증 본인 워킹그룹 네트워크(JDWG)’를 이끌고 있는 후지타 가즈코(藤田和子·63) 대표의 경험이다. 대학병원 간호사 출신에 9년 간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간병한 경험까지 있었지만 자신에게 닥치니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특히 주변인들의 반응이 문제였다. “치매에 걸렸다고 하면 그동안 100이었던 능력이 1로 줄어드는 이미지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구요. 저는 크게 변한 게 없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치매에 걸린 당사자로서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발병 후에도 한동안 근무하던 병원을 그만두고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2014년 처음 JDWG가 결성됐을 당시엔 치매에 걸린 ‘본인’들이 발언하는 첫 단체로 주목 받았다. 이들은 치매를 앓는 이들이 간병이나 격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파트너’임을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알렸다.

올해부터 시행된 인지증기본법 제정 과정에도 당사자들의 역할이 컸다. 후지타 대표는 “2010년부터 후생노동성 등을 꾸준히 찾아다니며 법 제정을 요구했다”면서 “우리의 요청이 반영돼 이번 법의 정식 명칭이 그냥 기본법이 아니라 ‘공생 사회 실현 추진을 위한 인지증기본법’이 됐다”고 말했다. 법은 제1조에서 ‘치매에 걸린 사람이 존엄을 유지하며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 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고 선언한다.

그는 지난 2004년 일본에서 치매의 공식 명칭을 인지증으로 변경하면서 사회적 인식도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한국도 ‘어리석고 아둔하다’는 뜻을 가진 ‘치매’를 다른 용어로 바꾸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명칭 자체에 편견이 들어가 있는 상황에선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 자체가 시작되기 어려워요. 게다가 인지 능력의 장애, 저하라는 증상을 명칭에 담아야 증상이 발생했을 때 조기 진단을 받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단을 받은 지 17년째, 후지타 대표는 여전히 약을 먹으며 일상을 큰 문제 없이 이어가고 있다. 단체 직원들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일본 전국을 돌며 치매 인식 전환을 위한 희망 대사로도 활동 중이다. 실제 한 시간 넘게 그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연도와 수치를 말할 때를 제외하곤 인지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매년 검진을 받으면 조금씩 악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치매가 되기 전보다 더 활발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치매 진단을 받은 이들에게 “처음엔 어두운 터널에 들어간 듯 한없이 움츠러들지만, 거기서 나오기로 결심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면서 “다양한 일들에 도전하고 사회를 향해서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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