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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체제경쟁 패한 동독처럼 김정은 위기감에 '두 국가' 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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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김정은 의중 진단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연말·연초에 잇따라 던진 '폭탄 발언'은 핵실험 이상으로 파장이 메가톤급이다. 김일성·김정일 때와 달리 남북을 '적대적인 두 교전국'으로 규정하고, 민족과 통일을 부정한 발언에 담긴 의도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북한 주도의 통일론에 동조해온 주사파는 김정은의 기습 언행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침묵하더니 최근 잇따라 토론회를 열고 있다. 그런데 김정은의 민족과 통일 부정 발언에 대한 비판은 생략한 채 사후 합리화 논리 찾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김 위원장의 선언을 계기로) 2000년대 통일 운동은 종언을 고했다"라거나, "이제 북한을 '정상 국가 조선'으로 봤으면 좋겠다"는 궤변까지 쏟아내고 있다.

1972년 방북 김일성 면담 경험
북한, 적화 통일 포기한 적 없어
세습체제의 붕괴위협 차단 의도
더 도전적 대남 전략·전술 펼듯

 보수 성향의 전문가들은 비판적이다. 지난 22일 열린 세종특별정책포럼에서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주장해온 '1민족 1 국가 2 제도 2 정부'의 고려연방제에 의한 통일 실현 가능성이 없어지고 오히려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 가능성이 커지자 자기방어적 패배 선언을 했다"며 "주도권을 상실한 김정은이 대남 노선 전환을 선언해 주도권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조영기 한반도선진화재단 사무총장은 "북한은 결코 통일을 포기한 사실이 없다. 남북 체제 경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자 화해 협력에 의한 평화통일을 포기하고 핵 무력에 의한 적화 흡수통일로 돌아섰다"고 비판했다.

김대중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강인덕(92)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가 북한대학원대학교 도서관에서 김정은의 '두 국가' 발언 배경과 의도 등을 설명하고 있다. 평양이 고향인 그는 1950년 6.25전쟁 와중에 월남한 뒤 북한 연구에 평생 매진해왔다. 지금도 각종 북한 문헌을 두루 살핀다. 강정현 기자

김대중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강인덕(92)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가 북한대학원대학교 도서관에서 김정은의 '두 국가' 발언 배경과 의도 등을 설명하고 있다. 평양이 고향인 그는 1950년 6.25전쟁 와중에 월남한 뒤 북한 연구에 평생 매진해왔다. 지금도 각종 북한 문헌을 두루 살핀다. 강정현 기자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강인덕(92)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를 만났다. 좌우를 아우르는 남북문제 원로 전문가의 혜안을 듣기 위해서다. 평양이 고향인 그는 해병대 장교로 복무했고, 1961년 김종필 전 총리가 창설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북한국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16년간 북한 정보를 다뤘다. 특히 1972년 '7·4 공동성명' 발표 이후 그해 11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대표단원으로 방북해 김일성을 직접 만났다. '북한의 대남 전략과 통일전선'을 오래 연구했고, 지난 2022년에는 두 권짜리 『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을 출간했다.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 연설에 담긴 김정은의 대내외 메시지는.
 "노동신문에 게재된 김정은의 발언을 보면서 '남조선 영토를 평정하겠다'는 구절에 주목했다. 이 말은 김일성이 1950년 6·25전쟁을 일으키면서 제시했던 '국토 완정(完整)'과 같은 주장이다.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과 동일한 수준의 영도자가 된 듯 자신을 과시했다. 대내적으로 공포정치로 독재 기반을 구축했고, 대외적으로는 핵·미사일 개발로 한·미·일 등 적대 세력과 대결할 수 있는 현대적 군사력을 보유하게 됐다. 중국과 러시아까지 동의한 전례 없는 대북 제재에도 지난 10여년의 집권 기간에 자력갱생으로 경제 생산과 건설을 계속해 아버지 김정일 시대처럼 수많은 인민이 굶어 죽는 '고난의 행군'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의 군사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유리한 국내외 정세를 형성했다. 정치·외교·경제·군사적 치적을 바탕으로 향후 더욱 도전적인 대남 정책과 전략·전술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5월 16일 군사정찰위성 1호기를 시찰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손에 담배가 들려 있다. 김 위원장의 얼굴이 스트레스에 찌든듯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옆에 딸 김주애가 앉아 있다.[연합뉴스]

지난해 5월 16일 군사정찰위성 1호기를 시찰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손에 담배가 들려 있다. 김 위원장의 얼굴이 스트레스에 찌든듯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옆에 딸 김주애가 앉아 있다.[연합뉴스]

남북관계 개선 가능성 없다고 본 듯

 -하나의 민족을 부정하고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라 규정했다.
 "한마디로 북한의 체제 수호에 엄청난 위협이 도래했다고 김정은이 판단한 것이다. 북한식 사회주의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의 체제 경쟁에서 패배한 것을 스스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김일성은 '언어·사회·문화가 동일한 인간 집단'이란 마르크스주의의 민족 개념에 혈통을 추가했다. 북한 체제가 우위를 유지했다면 굳이 남북 관계를 바꿀 이유가 없다. 더 강력하게 남북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고, 하나의 민족을 주장하며 사회주의 혁명을 선동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다. 해외에 파견된 외교관과 수십만의 외화벌이 일꾼 등을 통해 남한 정보가 북한에 물밀 듯이 유입되고 있다. 휴대전화가 500만대를 넘었고 컴퓨터 사용자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북한의 'MZ 세대'는 해외 정보와 남한 문화에 쉽게 접근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북한의 세습 독재 체제를 밑으로부터 붕괴시키는 강력한 위협 요소다. 이를 막기 위해 북한은 '반동 사상·문화 배격법'과 '평양 문화어 보호법' 같은 기상천외한 악법을 도입했다. 강력한 대북 정책을 추진하는 윤석열 정부가 등장하자 남북 관계 개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적대 세력의 침략 위협을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1974년 당시 에리히 호네커 동독 통일사회당 서기장이 '두 개의 독일'을 선언했던 것처럼 김정은이 '두 국가'(Two Koreas)를 선언한 것이다."  
 -적화 통일을 외쳤던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을 폐기한 것인가.
 "김정은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통일 유훈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뜻, 즉 통일 유훈의 정수를 정확히 이해하고 계승·수호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김정은은 내심 핵·미사일 개발로 무력 통일 가능성이 커졌다고 볼 것이다. 김일성도 김정일도 비군사적 방법으로 통일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겉으로는 연방제 통일과 평화 통일을 떠들었지만, 속으로는 남조선 혁명을 통한 적화 통일이자 주체사상에 의한 통일을 노려왔다. 79년간의 3대 세습 기간에 무력 통일 노선엔 변화가 없었는데, 마치 북한이 달라진 것처럼 여긴 것은 우리다."
2018년 9월 20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백두산 천지에 올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전날 두 사람은 '9.19공동선언'을 발표했으나 한반도 평화는 아직 요원하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2018년 9월 20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백두산 천지에 올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전날 두 사람은 '9.19공동선언'을 발표했으나 한반도 평화는 아직 요원하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대남공작과 교란작전은 계속 자행
 -조평통 등 대남 대화·교류 기구를 전격 폐지했다.

 "북한이 남북 관계를 적대 관계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평정할 대상이라고 선언한 상황이니 대화와 교류 협력을 위해 조직했던 조평통·민경협 등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앞으로 대남 사업은 '국가 대 국가'라는 논리에 따라 군사력 담당 부서인 인민군 총참모부 정찰총국, 외교를 맡은 외무성이 담당하면 된다고 북한은 보고 있다. '제1의 적국'으로 규정한 한국을 외교와 군사 위협으로 대하면 된다고 여기니 앞으로도 대남 공작은 계속할 것이다. 대남 기구들이 해체됐으니 대남 공작과 교란 작전을 안 할 거라는 논리는 지극히 안이하다. 외무성 조국통일국과 총참모부 정찰총국, 그리고 각 군단 산하 경보병 부대가 대남 공작 및 교란 작전을 담당하면서 SNS 여론 조작, 심리전, 간첩 침투 및 지하당 조직 등을 끊임없이 자행할 것이다."
 -이제 남북은 사실상 영구 분단체제로 가나.
 "1972년 7·4 공동성명 발표 당시 중앙정보부 북한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해 11월 북한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대표단원으로 방북한 뒤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 "남북 대화에 응한 북한에 전술적 변화는 있어도 전략적 변화는 없다"고 보고했는데 박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은 핵 개발에 반대하는 국제사회의 압력을 피하려는 북한의 전술적 방편이었다. 남북이 동의한 모든 선언과 합의서는 북한이 지키려 하지 않는 한 이미 그때부터 무효인 문서일 뿐이다. 향후 남북한이 영구 분단 체제로 가느냐 여부는 선언이나 합의문 폐기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남북 쌍방이 분단 종식을 위한 대책을 실천하는가에 달렸다. 역학 관계의 변화가 영구 분단이냐, 분단 종식이냐를 결정하는 관건이다." 
1972년 11월 3일 당시 강인덕 중앙정보부 북한국장이 남북조절위원회 대표단원 자격으로 방북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가운데)의 소개로 김일성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강인덕 석좌교수 소장]

1972년 11월 3일 당시 강인덕 중앙정보부 북한국장이 남북조절위원회 대표단원 자격으로 방북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가운데)의 소개로 김일성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강인덕 석좌교수 소장]

의연하게 평화적 통일 지향해야

 -북한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할까.
 "북한이 대남 인식을 바꿨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이 북한을 '우리의 적대 국가'로 재삼 규정할 필요는 없다. 윤석열 정부 들어 국방부가 발간한 '국방백서'에 북한 정권과 북한군을 적으로 규정했지만, 북한 동포는 앞으로도 적이 아니라 피를 나눈 같은 민족이란 인식을 가져야 한다. 헌법 3조(영토 조항)와 4조(통일 조항)에 따라 지금까지 유지해온 남북 관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말고 의연하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 김정은이 전쟁으로 통일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 평화는 전쟁에 대비하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핵 사용은 김정은 정권의 종말'이란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군사적 대응 태세를 더 강화해야 한다. "
 -정부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국내외 적대 세력이 가하는 안보 위협은 물론이고 동맹국과 우호 협력국이 가하는 국익 훼손 위협 등에 대해 전방위적 대응 태세를 수립하고 실행해야 한다. 국정원은 가장 효과적인 대북정보 심리전, 정치작전 수행기구다. 북한의 체제 변화가 김정은의 핵 위협을 제거하는 유효한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국정원 대북 심리전 부서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통일부는 앞으로도 남북 관계를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관점에서 정세 변화에 따른 남북 대화 재개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조직과 인원 감축보다는 정세 변화에 맞게 임무를 조정·재배치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통일부가 국민의 통일 의식을 고취해야 북한의 '두 국가' 주장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92세인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요즘도 서울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 도서관에 매주 나가 북한이 발간한 1차 자료를 직접 챙긴다. 그는 2022년 두권 짜리『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을 출간했다. 장세정 기자

올해 92세인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요즘도 서울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 도서관에 매주 나가 북한이 발간한 1차 자료를 직접 챙긴다. 그는 2022년 두권 짜리『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을 출간했다. 장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