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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현목의 시선

인정도, 사죄도 않는 그들이 진짜 ‘괴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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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현목 기자 중앙일보 문화부장
정현목 문화부장

정현목 문화부장

얼마 전 시즌1이 마무리된 넷플릭스 시리즈 ‘경성크리처’는 일제 강점기인 1945년, 경성을 무대로 펼쳐지는 스릴러물이다. 병원 지하에서 의문의 실험에 의해 만들어진 괴수(크리처)를 둘러싸고 은폐하려는 자와 파헤치려는 자의 싸움이 펼쳐진다.

괴수는 납치한 조선인을 상대로 일본군이 비밀리에 시행한 생체실험의 결과물이다. 세균전 등을 위해 중국·조선인, 연합군 포로 등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했던 일제 731부대를 모티브로 했다. 생체실험 희생자들의 신체 일부가 담긴 포르말린 병, 그 옆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조선인들의 모습은 끔찍하고 충격적이다.

731부대 만행 다룬 ‘경성크리처’
일제의 전쟁범죄 전세계에 알려
생존자 증언에도 일 정부는 부인

작품의 만듦새는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일제의 전쟁범죄가 글로벌 OTT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건 작품 외적인 성과다. 과거 전쟁범죄를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일본에선 ‘작품의 모티브인 731부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이 작품은 32년 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MBC)까지 소환했다. ‘경성크리처’의 강은경 작가가 영향 받았다고 밝힌 작품이다. ‘여명의 눈동자’는 일본군에 징집돼 731부대에 배치된 하림(박상원)의 눈을 통해 생체실험, 세균전 등 일본군의 잔혹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마루타’(통나무란 뜻의 일본어)라 불린 생체실험 대상자들의 눈을 가린 채 한 줄로 세운 뒤 가슴에 총을 쏴 몇 명까지 관통하는지, 소총 화력을 실험하는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경성크리처’나 ‘여명의 눈동자’에서 보여준 건, 실제 731부대 만행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731부대는 동상 실험, 탄저·콜레라·페스트균 주입 실험, 모성본능 실험, 내장교체 실험, 대체수혈 실험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경성크리처’에서 괴물로 변한 엄마가 자신의 딸을 공격하는지 테스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모성본능 실험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주인공 장태상(박서준)의 대사처럼 “사람한테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731부대의 만행은 생존 부대원들에게도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소년병으로 731부대에 배속됐던 90대 노인은 부대 표본실에서 봤던 장면이 지금도 꿈에 나온다고 지난해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마루타의 다양한 신체 부위가 포르말린 병에 담겨 있었는데, 뱃속의 태아가 드러난 여성 시신이 담긴 병도 있었다고 한다. 손주 사진을 볼 때마다 포르말린 병에 담긴 태아가 떠올라 눈물이 흐른다고도 했다. 또 다른 전 대원은 “옷과 약을 달라”며 애원하던 마루타들의 절규가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고 했다.

‘경성크리처’ 초반에 나온 것처럼 이들은 패전 직전 생체실험 증거인멸에 동원됐으며, ‘포로로 잡히면 자살하라’는 지시와 함께 청산가리를 지급 받았다. 귀국한 대원들은 군 복무 경력을 감출 것, 공직에 나가지 않을 것, 대원끼리 연락하지 않을 것 등 세 가지를 서약한 뒤 제대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731부대의 존재는 시인했지만, 세균전과 생체실험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부인하고 있다. 731부대 주역 대부분은 처벌받기는커녕 의학계 등에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는 법. 양심의 가책을 느낀 생존 대원 또는 후손들이 당시의 전쟁범죄를 폭로하고 있으며, 일부 지자체와 사회단체 후원하에 강연회를 열고 있다. 일본 영화계 거장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731부대의 참상을 드러낸 영화 ‘스파이의 아내’를 만들어, 2020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 감독상을 받기도 했다.

구로사와 감독은 “자유와 평화가 보장된 것처럼 보이는 현대 일본에 언제 어디서 이런 광기가 다시 출현할지 알 수 없는 일”이라며 “영화를 통해 끔찍한 위기의 상황이 언제든 닥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런 ‘광기’로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야말로 진짜 ‘괴물’이라는 게 ‘경성크리처’의 메시지다.

“그래 놓고 저들은 세상 앞에 시치미를 떼겠지.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고. 그런 일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이게 그들의 방식일세. 덮어버리고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리고.”(‘경성크리처’ 장태상의 대사)

731부대의 생체실험뿐인가. 과거 전쟁 범죄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평화헌법을 무력화하려는 ‘우경화’의 유령은 지금도 일본 열도에 스멀거리고 있고, 731부대가 날조된 이야기라는 주장이 난무한다. ‘경성크리처’를 괴수물이 아닌, 시대극으로 두 눈 부릅 뜨고 봐야 할 이유다. 작품에 서려 있는 민족의 슬픔, 아니 인류사적 비극이 쉬이 잊혀선 안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