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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사법농단 47개 혐의 모두 무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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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호 01면

양승태 사법농단 모두 무죄

일명 ‘사법농단’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2019년 2월 기소된 지 약 5년 만이다. [뉴스1]

일명 ‘사법농단’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2019년 2월 기소된 지 약 5년 만이다. [뉴스1]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한 1심 재판에서 양승태(76)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거의 5년이 걸린 재판에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부장판사 이종민·임정택·민소영)는 26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박병대(67)·고영한(69) 전 대법관에게도 무죄가 선고됐다.

특히 양 전 대법원장은 각종 재판 개입,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헌법재판소 견제, 비자금 조성 등 모두 47개 범죄 혐의(직권남용·직무유기·공무집행방해·공무상비밀누설 등)로 재판에 넘겨졌는데 1심 재판부는 모두 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2019년 2월 11일 서울중앙지법에 공소장을 접수하며 시작된 양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재판은 1심 결과가 나오는 데만 무려 1810일이 걸렸다.

기소 당시 검찰 공소장은 300페이지가 넘을 만큼 혐의가 방대했지만 결국 어느 혐의도 유죄가 인정되지 않았다. 우선 검찰은 양승태 사법부가 상고법원 도입 등 숙원 사업을 달성하기 위해 청와대의 입맛에 맞게 진행 중인 재판을 주무르려 했고 그런 정황이 고스란히 보고서로 남아 있다고 주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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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부분의 보고서와 관련해 재판 개입 의도부터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 거래 의혹’의 핵심은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이었다. 청와대와 외교부가 원하는 대로 결론을 바꾸거나 재판을 끌었다는 의혹이다. 이와 관련, 재판부는 법원행정처 판사가 외교부 입장대로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과 관련한 내부 보고서를 작성하고 관련 부서에 전달한 데 대해 “외교부와의 관계 등 사법부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검토하게 한 것”이라며 “재판 개입 의도였다기보다 이전 판결의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가능성을 검토하던 연구관실에 참고로 준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날 재판은 혐의가 방대한 만큼 시작부터 재판부 선고까지 4시간27분이 소요됐다. 선고 중간에는 10분간 휴정하는 이례적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날 판결 후 서울중앙지법 청사를 나가며 “당연한 귀결”이라며 “명쾌하게 판단 내려주신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기소와 공소 유지를 맡았던 서울중앙지검은 선고 직후 “1심 판결의 사실인정과 법리 판단을 면밀히 분석해 항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란 입장을 밝혔다.

핵심은 직권남용…‘권한 없으면 남용도 없다’ 판단 유지

‘사법농단 의혹’ 정점으로 지목돼 2019년 1월 24일 구속됐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같은 해 7월 22일 보석을 허가받고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뉴스1]

‘사법농단 의혹’ 정점으로 지목돼 2019년 1월 24일 구속됐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같은 해 7월 22일 보석을 허가받고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뉴스1]

양 전 대법원장이 사건 주심 대법관에게 “이전 판결을 번복하도록 결론을 설정해 줬다”고 검찰이 주장한 부분도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대법원장은 전원합의체 재판장 지위도 갖고 있지만 사건에 관여할 권한은 없다”며 애초에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수 없다고 봤다. 또 “설령 그런 직무 권한이 있다 하더라도 양 전 대법원장이 한 말 정도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논의한 과정의 일부일 뿐”이라고 했다.

재판부가 ‘재판 개입이 맞다’고 인정한 건도 있었지만 당초 재판에 개입할 직권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직권남용도 될 수 없다고 했다. 일선 법원에서 한정위헌 취지로 위헌제청 결정을 하자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이를 취소하고 재결정하라고 한 사건이 이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검찰은 헌재와 위상 다툼을 하던 대법원이 일선 법관의 판단을 찍어 누른 건 직권남용이라 봤지만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에겐 재판에 관여할 일반적 직무 권한이 없다”는 논리로 해당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직권남용죄에 대한 재판부의 이날 판단은 2022년 대법원의 판단과 동일하다. 당시 대법원은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의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 사건에서 “부적절한 재판 관여를 했지만 애초에 재판에 관여할 직무권한이란 건 없고 월권행위에는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무죄를 확정한 바 있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과 두 대법관에 대해 적용된 다른 혐의에 대해서도 ▶애초에 그럴 수 있는 직권이 없었다고 보거나 ▶필요한 것을 시켰기 때문에 남용이 아니라거나 ▶위법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의무 없는 일이 아니라거나 ▶법원행정처의 메시지 전달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권리행사방해가 아니라고 판단해 무죄로 선고했다.

이 같은 논리에 따라 재판부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이후 통진당 소속 지방의회 의원들의 의원직 유지 여부를 따지는 사건을 맡은 판사에게 행정처가 특정한 입장을 문건이나 말로 전달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판사들이 이를 신경 쓰지 않고 각자 판단대로 했기 때문에 재판권 행사를 방해한 건 아니다”는 취지로 무죄 판결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의 단초가 된 ‘연구회 중복 가입 해소 조치’ 사건도 이날 비슷한 논리에 따라 무죄로 결론이 났다. 진보 성향인 국제인권법연구회 모임에 인원이 늘어나자 법원행정처가 연구회를 두 개 이상 가입하면 안 된다고 공지하며 국제인권법연구회 영향력을 축소하려 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중복 가입 해소 조치가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였다면 (이를 실행하려 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이를 근거로 설득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을 추론 근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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