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포로 65명 사망’ 러 수송기 사건…“우크라 실수면 젤렌스키에 치명타”

중앙일보

입력

러시아 영토에서 우크라이나 포로 65명을 태운 군 수송기가 24일(현지시간) 추락해 전원 사망한 사고를 놓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공방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군이 미사일로 쏴 격추됐다고 주장했고, 우크라이나는 미사일 발사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러시아의 계획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사고로 우크라이나 국내 여론이 악화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탄약·병력 부족으로 러시아군에 밀리고 서방 지원은 약화하면서 전쟁 피로감이 커진 가운데, 이번 사고가 우크라이나 여론을 흔드는 불쏘시개 역할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러·우크라, '포로 수송기' 책임 공방

24일 러시아 벨고로드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포로가 탄 군 수송기가 추락해 불이 나 연기와 함께 솟구치고 있다. AP=연합뉴스

24일 러시아 벨고로드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포로가 탄 군 수송기가 추락해 불이 나 연기와 함께 솟구치고 있다. AP=연합뉴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국방부는 24일 이날 오전 포로 교환을 위해 이송 중이던 우크라이나 병사 65명을 태운 일류신(IL)-76 수송기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접경지인 벨고로드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쏜 미사일에 격추돼 전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함께 탑승한 러시아인 승무원 6명, 호송 요원 3명도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묵묵부답이던 우크라이나군은 몇 시간이 지나 "오늘 포로 교환이 예정돼 있었던 것은 맞다"라면서도 "추락한 러시아군의 IL-76 수송기에 무엇이 실려 있었는지와 관련해서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없다"고 밝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밤 연설에서 "이번 사고는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러시아 영토에서 발생했으므로 국제적인 조사로 명확하게 규명해야 한다"면서 "러시아인들은 우리 포로들의 생명과 가족들과 우리 사회의 감정을 갖고 장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번 사고와 관련해 긴급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소집을 요구했고, 안보리 의장국인 프랑스는 25일 회의를 열기로 했다.

우크라 "러, 포로 세부사항 통보 안 해" 

BBC방송은 "이번 사고에는 의문점이 많다"면서 "러시아 측의 주장이 모두 거짓은 아니지만, 러시아는 허위 정보를 이용해 왔기 때문에 주의 깊게 확인해야 한다"고 밝혔다.

모스크바타임스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군사정보국은 러시아가 포로 수송 방식(도로·철도·항공 등)과 경로, 벨고로드 지역 인근 영공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선 통보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동안 포로 교환을 앞두고는 이런 내용을 알렸다는 것이다. 즉 "러시아가 고의로 포로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험에 빠뜨리려 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는 기존처럼 군 수송기를 이용해 벨고로드 비행장으로 이송될 것을 알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구조대원들이 24일 우크라이나 북동부 하르키우에서 전날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 건물 잔해에서 구조활동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우크라이나 구조대원들이 24일 우크라이나 북동부 하르키우에서 전날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 건물 잔해에서 구조활동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우크라이나는 이 수송기에 최근 공격이 잦아진 하르키우 등을 겨냥한 미사일이 있다고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S-300 방공 시스템용 미사일이 실려 있었다는 현지 매체 보도가 나왔다. 앞서 지난 23일 러시아군이 벨로고드 지역과 인접한 우크라이나 북동부 하르키우를 공습해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우크라이나군 당국은 사고 이후 "미사일 수송에 사용된다고 생각하는 러시아 비행기를 표적으로 삼는 것을 포함해 우리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조처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쏟아지는 음모론…러, 고의로 추락? 

수송기에 우크라이나군 포로가 정말 탔는지에 의문을 품는 시각도 있다. 이에 러시아 국영 RT 방송의 마르가리타 시모냔 편집장은 사망한 우크라이나군 포로 이름과 생년월일을 공개했다. 그중 최소 12명은 우크라이나에서 영웅으로 여겨지는 아조우 연대 소속이라고 영국 더타임스는 전했다.

아조우 연대 소속 병사 수백명은 동부 돈바스 지역과 크림반도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마리우폴을 끝까지 지키다 지난 2022년 5월 항복해 포로가 됐다. 우크라이나에선 저항의 상징으로 꼽히지만 러시아 강경파들은 전범이라며 사형을 요구했다.

아조우 연대에서 활동한 한 병사는 더타임스에 "만약 아조우 연대 병사가 있었다면, 러시아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수송기를 쉽게 추락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호송 요원이 3명인 것도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CNN은 전했다. 러시아에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막심 콜레스니코프는 "내가 비행기를 타고 벨고로드로 이송될 당시 50명의 포로가 있었는데 호송 요원은 20명이나 됐다"고 지적했다. 러시아가 사고를 예상하고 일부러 자국 탑승 인원을 줄였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지지율 하락 젤렌스키에 악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15일 월요일 스위스 베른 인근에서 스위스 대표단과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답변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15일 월요일 스위스 베른 인근에서 스위스 대표단과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답변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번 사고가 정보전의 최전선이 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뉴욕타임스(NYT)는 "우크라이나가 현재 탄약·병력 부족과 서방 지원 약화로 어려운 가운데, 자국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인 포로 석방 협상에서 이런 사고가 벌어지면서 큰 좌절에 빠지게 됐다"고 짚었다.

특히 사고 원인이 우크라이나군의 끔찍한 실수로 확인되면, 현 정부에 대한 우크라이나 국민의 불신이 높아질 수 있다. 미국전쟁연구소(ISW)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 '내부 정치적 투쟁으로 추락사가 일어났다'고 비난하는 등 우크라이나인들의 불만을 조장하는 러시아의 정보전이 시작됐다"고 전했다.

대경대 부설 한국군사연구소 김기원 교수는 "개전 초기만 해도 이런 사고가 발생하면 우크라이나에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화살을 돌리며 단결했는데, 최근에는 전쟁 장기화와 추가 동원 계획 등으로 현 정부에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며 "이번 사고는 젤렌스키 대통령에겐 정치적 타격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우크라이나 국민의 신뢰도는 점점 감소하는 추세다. 지난달 12일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KIIS)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는 84%(2022년 12월)에서 62%로 감소했다. 정부 신뢰도도 52%에서 26%로 떨어졌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