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간첩이 활개치도록 방치해 온 정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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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간첩 혐의로 복역한 뒤 보안관찰처분을 받은 인사가 재야단체 간부로 활동하면서 국가 기밀을 북한에 넘긴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한 단체의 공동의장을 맡아 지난해 맥아더 동상 철거운동을 이끌었고, 최근에는 미군기지 평택 이전 반대 시위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집회 등에도 개입했다고 한다. 간첩 혐의자가 수년간 길거리를 활보하고 시위대의 선두에 있었음에도 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가 막힐 뿐이다.

이번에 적발된 인사는 경찰의 동태 파악 대상이었다. 그는 1996년 간첩 혐의로 징역 4년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98년 8.15특사로 풀려났지만 보안관찰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보안관찰처분이 내려진 것은 검찰이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기간 갱신(2년 단위)을 위한 검찰의 출두 요구에도 불응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그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시위 현장을 누비고 다녔으니 공안사범 관리가 얼마나 허술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안사범 관리에 구멍이 생긴 것은 오래전부터 예고됐던 일이다. 지난해 7월 통일부는 국가정보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간첩 전력자 등 보안관찰처분 대상자 10명에 대해 '금강산 통일기행' 참석을 승인했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인 지난달 말에도 통일부는 국정원과 법무부의 반대 의견을 묵살하고 민주노동당 대표단의 방북을 승인해 줬다. 이처럼 공안사건 전력자에겐 관대하면서 공안 담당자들은 푸대접하고 있으니 공안사범 관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오죽하면 퇴임하는 국정원장이 "재임 중 가슴 뿌듯했던 것은 간첩사건 수사"라고 했을까.

간첩행위를 처벌하고 전력자를 관리하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이들이 활개치고 다니도록 방치한다면 그것은 정부의 직무유기다. 현재 진행 중인 일심회 사건 수사가 철저히 이뤄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어떤 축소 수사나 진실 왜곡이 있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