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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업은 소규모 공사장까지 처벌 대상…“범법자 양산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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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4일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고 있다. 가운데는 김도읍 위원장. [뉴스1]

24일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고 있다. 가운데는 김도읍 위원장. [뉴스1]

오는 27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 적용되는 가운데 당정이 추진하던 ‘2년 적용 유예’ 법안이 사실상 무산 위기에 놓였다. 야당 반대로 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되면서 25일 본회의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경영계에선 “동네 빵집까지 범법자로 만든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최대 3년의 유예기간에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정부에 대한 책임론도 제기되고 있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4일 김진표 국회의장 주재로 중대재해법 관련 비공개 회동을 가졌지만, 합의에 이르는 데엔 실패했다. 같은 날 열린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도 확대 적용 유예를 담은 개정안은 상정되지도 못했다. 여야는 25일 본회의 전까지 협상을 이어간다는 계획이지만 사실상 마지막 기차를 떠나보냈다는 평가다.

기업 83만곳, 근로자 800만명이 영향권

중대재해법은 근로자 사망 등 중대재해 발생 시 안전보건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 대해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는 법이다.  2022년 1월 27일부터 상시근로자 50인 이상(공사금액 50억원 이상) 사업장에 우선 적용됐고, 2년 유예를 거쳐 오는 27일부터 50인 미만(50억원 미만) 중소 사업장까지 확대 적용될 예정이다. 다만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정부·여당과 경영계에선 2년 더 유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해 왔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정부는 전국 83만여 개의 중소기업이 중대재해법 처벌 대상에 포함되면 산업 현장에 혼란이 커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날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 오영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함께 긴급 브리핑을 열고 “83만7000개의 50인 미만 기업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그곳에서 일하는 800만 근로자의 고용과 일자리에 미칠 것이 자명하다”며 “상시 근로자 5명 이상인 동네 음식점이나 빵집 사장님도 중대재해법 확대 적용 대상이 된다”고 밝혔다.

실제로 상시근로자가 5명 이상이라면 흔히 생각되는 제조업·건설업뿐 아니라 동네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소상공인일지라도 중대재해 발생 시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이 중대재해법 적용 대상인지, 정확히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는 점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중소 사업장 1053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서 94%가 ‘중대재해법 적용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 장관은 “지금 이 순간 영세 자영업자인 동네 개인사업주, 소액 건설현장에서 대기업도 어려워하는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안전 인력·예산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종사자 수 기준으로 5인 미만 사업장은 중대재해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과 달리, 건설금액 기준은 하한선이 없어 사실상 전국 모든 소규모 공사장까지 처벌 대상에 들어간다. 대한건설단체총연합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건설기업의 99%가 넘는 중소 건설기업은 형사처벌을 면하기 어려워 범법자가 양산되고, 기업의 존립은 물론 소속 종사자의 생계까지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유예기간 3년간 정부는 뭐했나” 지적도

중소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이행 준비 실태조사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이행 준비 실태조사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한국경영자총협회]

이대로 확대 적용되면 당장 중대재해 수사 현장에도 혼선이 불가피하다. 지금도 중대재해 사건 수사는 극심한 인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고용부에 따르면 전국 지방노동청 내 광역중대재해수사과에 소속된 수사관은 정원 100명에 정원 외 인력까지 끌어들여 총 133명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금까지 고용부가 수사 혹은 내사한 중대재해 사건은 510건으로, 이 가운데 33건만 검찰에 넘어간 상태다. 문제는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올해 중대재해 수사관 정원이 고작 10여 명 늘어나는 데 그쳤다는 점이다. 수사 인력은 거의 차이가 없지만, 중대재해법 대상 사업장은 2배 이상으로 늘어나는 만큼 업무 부담은 커지고 사건 처리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다. 고용부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중대재해 사고 사망자 644명 중 60.2%인 388명이 50인 미만 사업장 소속이었다. 이 장관도 이날 브리핑에서 “(확대 적용 시) 고용부의 행정 역량이 수사에 치우쳐 산업재해 예방이나 감독 기능이 현저히 약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중대재해법이 2021년 1월에 제정된 이후 약 3년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정부가 제대로 대비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정부는 지난해 초부터 중대재해법 개선 태스크포스(TF)를 운영했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했다”며 “50인 미만 사업장의 실정에 맞도록 실효성 있게 안전보건 의무를 고쳤어야 했다”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이날 “고용부가 경제단체의 호소만을 대변하고 있는 상황을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비판했다. 중대재해법 시행의 발단이 된 고(故) 김용균씨 어머니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도 “지난 3년을 돌이켜보면 죽음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는데 이번에 또 유예하게 되면 법 취지가 무색해질 게 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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