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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지만 서정적인…우리 근현대 추상미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사진 ①

사진 ①

변영원(1921~1988, ‘합존 97’(1969·①)), 김충선(1925~1994), 변희천(1909~1991), 이상욱(1923~1988), 문복철(1941~2003)···. 우리가 알지 못했던 예술가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한국 기하학적 추상미술’ (5월 19일까지) 전시를 본 관람객들이 절로 중얼거리게 되는 말이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비밀 상자를 열어젖히듯 이번 전시는 그동안 미술사에서 소외돼 묻혀 있던 작가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전시는 1920년대부터 1970년까지 한국 대표 추상 미술가 47인의 작품 150여 점과 아카이브 100여 점을 통해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역사를 조망한다.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점과 선, 원과 사각형 등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강조하는 회화의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피에트 몬드리안이나 바실리 칸딘스키 같은 서구 작가들이 거론되지만, 이번 전시는 한국에도 독자적 방식으로 기하학적 추상 미술을 시도한 작가들이 꽤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진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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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2월 극장 단성사가 영화 홍보를 위해 만든 ‘단성주보’(②) 300호 표지에 기하학적인 추상 이미지가 등장했다. 이 시기의 추상은 주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잡지에 ‘새로움’과 ‘혁신’ 등 새로움과 혁신을 상징하는 미래 지향적 감각을 드러내는 이미지였다.

사진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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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57년 바우하우스를 모델로 한국 최초로 결성된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 연합 그룹 ‘신조형파’ 작가들의 활동으로 다양한 작품이 제작됐다. 김충선의 ‘무제’(1959·④)를 포함한 변영원·이상욱·조병현의 작품이 이 시기에 나왔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변영원이다. 1940년대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귀국한 이래 일관되게 비구상 작업을 했던 작가로, 그는 “회화의 기본 요소인 선과 색으로 이루어진 추상미술이야말로 미래의 원자 시대를 대변하는 미술”이라고 보았다. 변영원은 신조형파가 해체된 이후로는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1956년 홍익대 서양화과 동문인 김영환·문우식·박서보와 ‘반(反)국전 선언’을 발표하며 ‘4인전’을 열었던 작가 김충선의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대상을 원색의 색면으로 분할하고 평면성을 강조하면서도 물감을 두껍게 발라 화면의 질감을 강조한 작품 ‘무제’(1959)는 그가 당시 생각했던 현대미술의 면모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진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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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유영국·류경채·이준(1세대 추상 미술가)과 이기원·전성우·하인두(2세대) 등의 작품도 ‘한국적 서정주의 추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자연의 형태를 단순화하거나 자연에 대한 서정적인 감성을 부여한 작품들이다. 이 전시를 기획한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한국 추상미술의 특징은 앵포르멜과 단색화로 거론되는 경향이 있었다”며 “단색화로만 한국 추상의 특징을 귀결 시키기에는 기하추상 시기가 짧지만 매우 의미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 새로 발굴돼 공개되는 작품도 여럿 있다. 윤형근이 1969년 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작품 ‘69-E8’(③)은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가 작가 작업실에서 둘둘 말린 채로 발굴돼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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