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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보다 센 저출산 불똥, 정치권으로 튀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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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최경호 기자 중앙일보 광주총국장
최경호 광주총국장

최경호 광주총국장

“한국의 인구감소 속도가 중세 유럽의 흑사병시대보다 빠르다.”

지난달 2일 미국 뉴욕타임스에 실린 칼럼 내용이다. 한국의 합계출산율(0.77명)이 흑사병 당시의 인구 감소를 능가하는 수준이라는 글이었다. ‘한국은 소멸하고 있나’라는 제목의 로스 다우댓의 칼럼은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외신까지 우려한 저출산의 그늘은 현장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보육시설 붕괴로 시작된 저출산 여파가 교육·국방·산업현장 전반을 위협하는 모양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대한민국 주민등록 인구는 5132만5329명으로 4년 연속 줄었다.

저출산 여파로 지난해 폐교된 뒤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서울 광진구 화양초등학교 전경. [뉴시스]

저출산 여파로 지난해 폐교된 뒤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서울 광진구 화양초등학교 전경. [뉴시스]

저출산의 공포가 가장 먼저 손을 뻗친 곳은 전국 보육시설이다. 어린이집 원생이 사라지면서 매년 2000곳 이상 문을 닫고 있다. 2012년 4만2572곳이던 어린이집은 2022년 3만923곳으로 10년 새 27%(1만1649곳) 줄었다. 폐업 규모도 2020년 2019곳, 2021년 2106곳, 2022년 2323곳으로 가속도가 붙었다.

이 과정에서 손주가 다니던 어린이집이 할머니·할아버지가 다니는 노인시설로 급격히 바뀌고 있다. 보육시설이 줄폐업하면서 일자리를 잃는 교사·운전기사 등도 급증하는 추세다. 어린이집 원장이 요양원 원장이 되고, 무용학원 원장이 장례지도사가 되는 사례도 등장했다. 노인센터에 남겨진 궁전 모양의 유치원 건물과 놀이터엔 저출산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기록적인 영유아 감소는 학령인구 급감을 초래했다. 초저출산 여파로 올해 초등학교 입학생이 사상 최초로 30만 명대로 떨어졌다. 현재 추세면 2년 뒤인 2026년 입학생은 20만 명대로 떨어질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커지면서 장례식장으로 간판을 바꿔 다는 결혼식장도 생겨났다.

국방 부분에도 비상이 걸렸다. 2018년 61만8000명이던 국군 상비병력은 지난해 50만 명대로 떨어졌다. 미국 CNN은 최근 한국 군(軍)의 새로운 적(敵)으로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꼽기도 했다.

저출산의 불똥은 정치권으로 튀었다.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저출산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신혼부부에게 10년 만기로 1억원을 대출해주는 공약을 내놨다. 첫째를 낳으면 이자 감면, 둘째를 낳으면 원금 50% 감면, 셋째를 낳으면 전액을 감면하는 방식이다.

국민의힘은 육아휴직 급여를 월 60만원으로 올리고, 아빠의 한 달 유급휴가를 의무화하겠다고 공약했다. 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은 ‘헝가리 모델’을 제안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면 2억원을 1%대 금리로 대출해준 뒤 자녀 1명을 낳을 때마다 3분의 1씩 원금을 탕감해주는 모델이다. 전문가들조차 찬반이 갈리는 지원책들이 외신들의 우려를 기우(杞憂)로 바꿀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