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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효식의 시선

조희대 대법원장이 세종을 생각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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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효식 기자 중앙일보 사회부장
정효식 사회부장

정효식 사회부장

조희대 대법원장은 오래 전부터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의 판결과 형사사법 개혁에 관심이 많았다. 대구지법원장 시절인 2013년 10월 개최한 토론회에서 “쉬운 법률용어 사용과 판결서 작성은 국민에 대한 당연한 의무”라며 1432년 세종과 이조판서 허조와의 논쟁을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세종이 형법의 큰 죄들을 뽑아 쉬운 이두문으로 번역해 반포하라고 하자 허조가 “간악한 백성이 율문을 알게 되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서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무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반대했다. 세종은 “그렇다면 백성이 법을 알지 못하게 하고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 법을 알려주지도 않고 범법자를 처벌하는 건 조사모삼(朝四暮三)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는가”라고 꾸짖었다는 일화다.(세종실록 세종 14년 11월 7일)

“쉬운 용어와 판결서는 법관 의무”
일선 법원장 때 세종 일화 소개도
일제 용어 가득한 형법 개정 필요

당시 조선은 명나라법인 대명률 등 중국 법전을 가져와 형법으로 썼으나 용어가 어려워 웬만한 문신들도 뜻을 해독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일반 백성은 고사하고 소송을 담당하는 지방 관원도 법조문을 제대로 이해 못해 죄의 경중을 오인하고 제멋대로 형벌을 가하는 남형(濫刑), 재판을 미뤄 오랫동안 옥에 가두는 체옥(滯獄), 고문으로 무고한 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오결(誤決)이 잦았다.

이에 세종은 백성을 위한 법치가 무엇인지 고심했다. 가혹한 곤장과 매질을 못 하게 하고,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검시지침서를 펴내기도 했다. 이 중에서도 1443년(세종 25년) 12월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해 백성이 법률을 이해하기 쉽게 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다.

집현전 대제학이던 정인지는 1446년 발간된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중국의 글자를 빌려 써 글을 배우는 이는 뜻을 깨치기 어려워 걱정하고, 형벌을 다스리는 사람(治獄者)은 복잡한 사정을 이해하기 어려워 근심했다”며 “한글로서 송사를 들으면(聽訟) 그 속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적었다. (조병인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 2019)

그러나 유학자들의 반발도 거셌다. 한글 창제 3개월 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은 이른바 ‘갑자상소’에서 “따로 한글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와 같아지려 하느냐”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옥사(獄辭·판결서)에서 백성이 한 글자 착오로 원통함을 당할 수 있었지만, 이제 한글로 말을 직접 쓰고 읽고 들으면 다 쉽게 알아들어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란 세종의 의도에 대해서도 공격했다.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에서 억울하게 잘못된 일이 많았다” “우리나라도 죄수가 허위 자백을 하는 건 매를 견디지 못해서지 글을 몰라서가 아니다. 결국 형옥(刑獄)의 공평함은 옥리(獄吏)에게 달렸지, ‘한글로서 공평하게 한다’는 건 신들은 옳은 줄 모르겠다”는 등 논리를 펴면서다.

이에 세종은 “신라 설총의 이두가 백성을 편하게 한 것이면 한글 역시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며 “너희가 이러고도 이치를 안다는 선비(儒者)냐”고 분통을 터뜨리기까지 했다.(세종 26년 2월 20일)

조 대법원장이 최근 백성이 즐거운 세상(生生之樂)을 꿈꿨던 세종을 부쩍 언급한다고 한다. 지난달 14일 취임사에서 “국민이 안심하고 편안하게 살게 하는 법(치)”라는 얘기도 꺼냈다. 6년여 전 전임자의 취임사와는 대비될 만큼 낮은 목소리지만 ‘진영’이 아닌 ‘국민’을 본다는 점에선 손뼉 칠 일이다. 그땐 “사법부 개혁의 소명 완수에 열정을 바칠 것”이라며 “변화는 시작됐다. 변화는 결과만 아니라 과정도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 후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추가조사와 검찰의 이른바 사법적폐 청산(또는 사법농단 의혹) 수사가 이어졌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등이 피고인석에 앉는 사법사상 초유의 사태가 연달아 벌어졌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재판에 넘겨진 지 5년 만인 오는 26일에서야 1심 선고를 받는다.

조 대법원장은 그 결과 보수·진보로 쪼개진 법원을 통합하고,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깊은 불신을 치유해야 하는 과제를 물려받게 됐다. 당장 시급한 과제로 꼽은 재판 지연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다만 이것들이 국민 눈높이에서 체감할 수 있는 사법부의 변화로 보기엔 부족하다. 전임 대법원장 시절부터 내부적 검토만 하다가 불발됐던 디지털 판결문 등 공개로 국민의 사법정보 접근권을 확대하고 재판의 투명성을 높이는 건 꼭 이뤄져야 한다. 이참에 일제 용어 잔재가 가득한 71살 ‘형법’을 현대 우리말로 전면개정하고, 이 중 양형은 분리해 ‘양형기준법’을 제정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검토했으면 한다. 그게 세종이 이루려한 바를 완성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