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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누구나 맑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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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열아홉 살의 겨울, 가야산 해인사에 처음 입산할 때의 일이다. 해발 700m에 자리한 산중 절은 마치 소나무가 흰 눈을 덮어쓴 모양으로 꽁꽁 얼어 있었다. 그러나 스님들이 정진하는 선방은 밤낮없이 불이 환했고, 졸음 쫓는 죽비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스님들은 물론 행자들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날을 기념하는 성도절(成道節)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대중들은 성철스님의 가르침 아래 7일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좌복(방석) 위에 앉아 참선을 했다. 이 7일 용맹정진에는 나이나 소임도 따지지 않고 산중의 모든 대중이 참여했다. 자정에는 장작불로 가마솥 가득히 잣죽을 쑤어 질통에 담아 줄지어 선방으로 들였다. 잣죽을 먹고 나면 으레 꾸벅꾸벅 졸음이 밀려왔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졸음과 싸워 이겨내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 용맹정진을 마치고 나면 시나브로 눈동자는 또렷하고 까맣게 빛났다. 의식은 초롱초롱했고 뜨거운 열기가 도량 가득 피어올랐다. 음력으로 십이월 팔일, 샛별이 뜨는 새벽,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은 그 시각에 죽비 세 번을 치며 용맹정진은 끝났다. 그러나 한번 달궈진 정진의 열기는 식지 않아, 앞에 바라보이는 청량산 마루를 단숨에 뛰어올랐다.

부처님 깨달음 장소에서 열린
세계승가포럼의 열기와 정성
‘수처작주 입처개진’ 새삼 다져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이번 겨울에는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달라이라마 존자가 남방불교와 북방불교 전통을 계승하는 스님들과 미주 및 유럽에서 활동하는 세계 각국의 스님들을 보드가야로 초청하여 세계승가포럼을 연 것이다. 무려 17개국에서 2500명의 스님이 참가하였으니, 그 규모가 대단했다.

첫날 새벽 다섯 시,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보리수와 마하보디 대탑을 참배하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향 내음과 향 연기가 대탑 곳곳에 가득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도 향기가 풍겨왔다. 내 몸과 가사에도 금세 향 내음이 배었다. 다양한 모습 속에서 공통의 성품이 느껴졌다. 보이는 다양한 모습들이 모두 내 안에 있음을 마음으로 느꼈다. 경전을 읽는 스님들, 오체투지 절을 하는 스님들, 옴마니반메훔을 염하는 사람들, 탁발하는 스님들, 꽃을 사라며 내미는 장사꾼의 손길, 구걸하며 따라오는 손, 환전해주겠다며 돈을 내미는 손, 빗자루 들고 청소하는 사람들, 참배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 검색하는 경찰과 관리인들까지도 나의 또 다른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 어떤 차별도 어색함도 없이 모두가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일주일 내내 내 얼굴에서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화엄경’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2600년 전 이곳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 얻고 감탄하면서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모든 중생이 여래와 같은 지혜와 덕상이 있건만 분별망상으로 인해 알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깨달음을 얻고 난 뒤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의 성품을 있음을 보는 혜안이 생겨났다는 말이다. 온통 부처님들로 가득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자각은 얼마나 환희롭고 기쁜 일이었을까!

포럼 네 번째 날, 보리수 앞에서 달라이라마 존자와 세계 각국의 스님들이 모여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그사이에 내 마음을 담은 발원문을 적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룬 보리수 아래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발원합니다. / 인류의 생명해탈을 선언한 거룩하고도 큰 자비는 미래세상이 다하도록 우주 법계에 두루 할 것입니다. / 바라옵건대 크신 원력의 공덕으로 지구별의 전쟁위기와 생태위기, 경제위기는 멈추고, / 연기법의 가르침으로 서로 돕는 행복한 세상이 되고, / 불이중도(不二中道)의 가르침으로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이 되고, / 본래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는 수행으로 진실한 세상이 되기를 발원합니다.(하략)’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 새벽에는 홀로 마하보디 대탑을 거닐었다. 깨달음이 시작된 신성한 장소에 세 번의 절을 올렸다. 내 몸을 그릇 삼아 맑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득 담았다. 보리수 아래, 그 고요 가운데에서 한참을 앉았다가, 가만히 일어나 대탑을 돌았다. 인도에서는 탑돌이를 ‘꼬라를 돈다’고 한다. 그 마음 그대로 맨 안쪽의 꼬라를 돌고, 또 중간의 꼬라를 돌고, 이어 큰 원을 그리며 꼬라를 돌았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꾸리면서도 내 마음은 꼬라를 돌고 있었고, 비행기를 타면서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꼬라를 도는 마음이 지속되고 있다. 지하철을 타면서도, 학교에 가면서도, 또 병원에 가서도 신성한 꼬라를 돌고 있다.

이 마음이면 세상 어느 구석진 곳도 신성하지 않은 곳이 없다. 이 마음이면 누구나 맑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의 삶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고요함, 깨달음으로 앉고 선 그 자리가 거룩한 자리이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