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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세정의 시선

김정은 민족·통일 부정에 주사파 '멘붕 침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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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남북관계가 험악해질 때마다 북한은 '삶은 소대가리' 등 엽기적 언사로 협박했고,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무력 도발해 한반도 평화를 위협했다. 그런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연말 연초 '폭탄 발언'은 과거와는 차원이 전혀 달라 비상한 대응이 필요하다.

지난해 9월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북한 정권 수립 75주년 열병식에서 박정천 당 군정지도부장이 무릎을 꿇은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딸 주애(11)와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지난해 9월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북한 정권 수립 75주년 열병식에서 박정천 당 군정지도부장이 무릎을 꿇은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딸 주애(11)와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김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30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북남 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고착됐다"고 단언했다. 지난 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는 "우리 공화국의 민족 역사에서 통일·화해·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기존 북한 헌법에 있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 표현을 삭제하고, 향후 헌법에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으로 명기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민족경제협력국·금강산국제관광국 등 대남 기구를 없앴다.

김일성·김정일 유훈에도 어긋나
조총련 문의에 통전부 회신 없어
김씨 정권의 기만성 널리 알려야

 북한의 이런 조치들은 1972년 7·4 남북공동 선언의 자주·평화·민족대단결 등 3대 정신을 훼손한 것이라고 대북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고 규정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평화·통일·화해 원칙을 전면 부정한 것으로 해석한다.

북한에 봉건적 3대 세습 체제를 구축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왼쪽부터)[중앙포토]

북한에 봉건적 3대 세습 체제를 구축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왼쪽부터)[중앙포토]

 '민족과 통일 부정' 발언을 접한 북한 주민들과 친북 세력은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김일성 주석 이래 지속돼온 북한 정권의 선전·선동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급변침'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본 조총련 사정에 밝은 고위 대북 소식통은 "그동안 북한의 지침에 따라 통일 운동을 해온 조총련 측이 당황한 나머지 '이제 통일을 안 하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냐'며 다급히 통일전선부에 문의했으나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 종북 주사파들이 침묵하는 것은 더더욱 놀랍고 의아하다. 그동안 진정으로 통일을 외쳐왔다면 김정은 정권의 반통일 노선 천명에 대해 비난하는 대규모 규탄 집회라도 열어야 할 텐데 아직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의 대남 전략 돌변으로 갑자기 방향 감각을 잃고 '멘붕'에 빠진 것일까.
 서울대 법대 재적생 시절이던 1986년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지금은 북한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는 김영환(61)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종북 주사파들이) 지금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일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는 1991년 5월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직접 만났던 '주사파 대부'였다.

2018년 9월 19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평양공동선언' 합의문 서명식을 지켜보고 있다. '평화 타령'이 끝나자 북한은 '전쟁 불사'를 떠들고 있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2018년 9월 19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평양공동선언' 합의문 서명식을 지켜보고 있다. '평화 타령'이 끝나자 북한은 '전쟁 불사'를 떠들고 있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6·25전쟁을 일으켰으나 적화 통일에 실패한 김일성이 살아 있다면 손자의 민족과 통일 부정 발언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김일성은 아마 엄청 분노했을 거다. 김정일은 조금 다를 것이다. 김정일은 북한 주도의 통일이 과대망상이라 여겼지만, 6·25 참전 노(老)간부들이 살아 있을 때라 김정은처럼 공개적으로 통일을 부정하는 입장을 밝히지는 못했다."
 -김정은은 왜 이 시점에 민족과 통일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을까.
 "북한은 1980년대 이전까지는 공세적 차원에서 통일을 주장했지만, 그 이후에는 남한을 반통일세력으로 몰아가는 방어적 차원에서 통일을 이용했다. 지금은 남한을 반통일 세력이라고 비난해도 북한 주민들에게 잘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남북 교류·협력과 통일이 김정은 체제의 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남파 간첩들에게 지령을 내리던 평양방송이 중단된 때문인지 종북 주사파들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여전히 나름 생존력이 있는 이석기(전 통진당 국회의원)의 경기동부연합 계열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나도 궁금하다. 아마도 북한을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괴상한 논리를 만들어 이번 난관을 적당히 돌파하려 할 것이다. 북한의 통일 선전·선동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온 감성적 종북 세력은 앞으로 구심력을 잃고 떨어져 나갈 것으로 보인다."

2013년 9월 4일 당시 국회에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찬성 258표, 기권 11표, 반대14표, 무효 6표로 통과되자 이 의원이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내란선동 등 혐의에 대한 대법원의 2015년 유죄 판결(징역 9년, 자격정지 7년)로 복역해오던 그는 20대 대선을 앞둔 2021년 12월 24일 문재인 정부의 가속방 조치로 풀려났다. 이후 공개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중앙포토]

2013년 9월 4일 당시 국회에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찬성 258표, 기권 11표, 반대14표, 무효 6표로 통과되자 이 의원이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내란선동 등 혐의에 대한 대법원의 2015년 유죄 판결(징역 9년, 자격정지 7년)로 복역해오던 그는 20대 대선을 앞둔 2021년 12월 24일 문재인 정부의 가속방 조치로 풀려났다. 이후 공개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중앙포토]

 새해 들어 남북 관계가 패러다임 전환이라 할 정도로 아주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북한의 도발 기류는 심상치 않다. 국방부와 합참은 물론이고 국정원과 통일부는 이럴 때일수록 북한의 숨은 의도와 내부 동향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역사 발전 흐름에 역행하는 봉건 세습 독재 정권의 시대착오적 거짓 선전·선동과 반민족·반통일 행태의 본질을 북한 주민과 국내외에 널리 알려야 한다. 북한의 돌변은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