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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앞으론 ‘제2의 이석기 사건’ 수사 어려워져

중앙일보

입력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 안보 문제 없을까

#2018년 4월 28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왓 바텀 공원. 한 남성이 계단에 앉아 생수병 마개를 따 물을 마시고 있다. 7~8m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다른 남성은 선글라스를 벗어 손수건으로 안경 렌즈를 닦는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치더니 북적대는 인파 속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간격을 유지한 채 이동하던 두 사람은 각각 오토바이와 택시를 타고 공원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둘은 어느 한적한 호텔의 객실로 들어섰다.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이 해외 거점으로 쓰던 곳이다. 감시의 눈을 피했다고 판단한 L씨 등 북한 공작원 2명과 한국에서 온 Y씨는 숙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매의 눈’으로 이들을 주시해 온 국가정보원 요원들에 의해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Y씨 등 일당 3명은 이로부터 3년 뒤인 2021년,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전직 국정원 직원 A씨가 전한 간첩단 사건의 전말은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A씨는 “몇 년 전부터 이들 핵심 피의자들을 추적해 왔지만 뚜렷한 증거를 잡지 못하다가 중국·캄보디아 등지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는 현장을 포착했다. 사진·동영상을 촬영하고 접선 경로를 추적하는 등 핵심 증거를 채집, 본격 수사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통상 간첩 사건은 최초의 첩보와 혐의 포착→내사를 통한 증거 수집→본격 수사→검거 및 기소→재판까지 수년에서, 길게는 십수 년이 걸린다. 국정원이 수집한 정보가 단서가 되지만 압수수색·감청 등 수사를 통해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위의 간첩단 사건에서도 이들이 북한으로부터 F-35 스텔스 전투기 도입을 반대하라는 등의 지령문을 받은 사실이나 2만 달러의 공작금을 받은 정황 등은 수사 착수 후 압수수색에서 드러난 것이다.

간첩 확실하지 않으면 정보 수집 못 해

하지만 이런 패턴의 간첩 수사가 이젠 어려워졌다. 국정원법 개정으로 올 1월 1일부터 국정원이 직접 간첩 사건을 수사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또 국정원의 직무 범위에서 ▶국내 보안정보 ▶대공 ▶대정부 전복 관련 업무가 삭제되고, ▶국외 및 북한 ▶사이버 안보 ▶위성 자산 정보의 수집·작성·배포만 할 수 있게 했다. 다시 말해 ‘북한과의 연계가 확실하거나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수사는 물론 정보 수집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국정원 대공 수사파트에서 근무했던 정구영 한국통합전략연구원 부원장은 “간첩 의심자의 행적을 추적하고도 북한 공작원과 접선 현장을 포착하지 못하거나 증거 인멸로 북한 연계를 입증하지 못하면 그간의 정보 수집 활동은 불법이 된다. 그런데도 이를 각오하면서 간첩을 추적하고 채증 활동을 할 직원이 있겠느냐”며 “국정원(정보 수집)-경찰(수사)-검찰(공소 유지)의 3축 중 한 축이 무너지면서 나머지 두 축도 자동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해외에서 간첩 잡는 활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어느 나라든 정보 요원은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하는데, 채증 자료를 법정에 제시할 수 없고 되레 불법 활동 혐의로 불이익을 받는다면 정보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영상 촬영이나 사진 증거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수사관’ 신분으로 채증된 것이 아니면 법정에서 유의미한 증거로 채택되지 못하는 것도 장애 요인이다.

친북 세력 해외로 불러 사상교육

국내에 자생적 친북세력, 이른바 주체사상파(주사파)가 생겨나면서 북한은 간첩 직파보다 친북 세력을 해외로 불러내 사상교육을 하고 지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전환했다는 게 당국의 분석이다. 정 부원장은 “경찰이 국정원이 넘겨준 첩보를 받아서 과거 국정원이 하던 방식대로 해외에서 현장 채증을 해야 하는데, 한국 경찰 신분으로 외국에서 수사하는 건 주권 침해에 해당해 외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이 해외에서 대공 수사를 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국정원 대공수사단장을 지낸 황윤덕 양지회(전직 국정원 직원들 모임) 부회장은 “버젓이 친북 반국가 활동을 한 게 드러나도 북한과의 연결고리를 밝혀내지 못하면 국정원이 관여할 여지가 없게 됐다”며 “제2의 이석기 RO(Revolutionary Organization) 수사 같은 건 이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은 지하혁명 조직을 결성, KT 혜화지사 등 국가 기간시설 파괴 등을 모의한 혐의로 고발됐으나 대법원은 “RO의 실체는 인정되지 않는다”며 내란음모에 대해 무죄 판결했다(내란선동,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

“국민 설득 없이 안보부서 없애는 나라”

국정원법 개정은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20년 12월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국회 정보위·법사위와 본회의 모두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이 단독으로 처리했다. 국정원 출신의 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개정안을 발의했고, 전해철 정보위원장은 “국정원이 불법 행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개혁 법안이라며 법안 통과를 강행했다. 하지만 공청회 한 번 없이 다급하게 졸속 처리를 밀어붙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당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소속 정보위원이던 조태용 국정원장은 “어떤 나라가 국가안보의 핵심적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를 없애는데 국민 설득 없이 일단 없애자고 하나? 국가 핵심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를 없앤 다음 이게 어떻게 될지는 나중에 보자는 식의 국가안보는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여론조사기관 ‘공정’이 지난해 5월 11~12일 전국의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3%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에 대해 ‘모른다’고 답변했다.

경찰청 정보국장 출신의 이철규(국민의힘) 의원은 “대공수사권의 경찰 이관이라는 건 사실을 왜곡하고 국민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레토릭에 불과하다”며 “이관이라면 국정원의 장비와 예산·인력 등 권한과 역량을 넘겨줘야 하는데, 하나도 넘어간 게 없지 않느냐. 국정원이 대공수사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해체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공수사를 전담하게 된 경찰청은 국가수사본부 산하에 안보수사국과 안보수사단을 신설하고 경무관급을 단장에 임명하는 등 조직 정비에 한창이다. 안보수사 인력은 지난해보다 56% 증가한 1127명, 이 중 대공수사 인력은 700명이다. 수사관 역량 강화를 위해 안보수사 경력자를 전임안보수사관(5년 이상)과 책임안보수사관(7년 이상)에 발탁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일각에선 경찰이 그동안도 유관 수사를 해왔다는 점을 들어 수사 역량에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찰의 안보 수사는 국가보안법상의 찬양 고무, 집시법 위반, 탈북민 관리 등 치안 질서 침해 사범 위주였다. 국정원과 달리 해외 정보망이 없는 데다 다단계 보고 체계의 공개 조직이라 수사기밀 보안유지가 허술해질 수 있다. 입사부터 퇴사 때까지 대공수사만 전담하는 국정원 수사국과 달리 경찰은 순환인사제여서 전문성과 업무 연속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북한이라는 특수 집단을 상대하는 장기적인 간첩 수사를 해 본 적도, 전문성도 없다”(이철규 의원)는 게 결정적 취약점이다. 인력을 늘린다 해도 수사 역량을 하루아침에 끌어올릴 순 없다.

안보범죄 정보 협의체 효율 가동해야

정부와 여당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복원이 필요하다”(조태용 원장)는 입장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협조 없이 법 개정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안보 공백 최소화를 위해 국정원·경찰·군·검찰 등 유관기관이 참여하는 ‘안보범죄 정보 협의체’의 효율적인 운영 모델을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황윤덕 부회장은 “수사의 착수와 종결권이 경찰에 있는 만큼 첩보 이첩 후 수사 진척 상황 등을 경찰이 성실히 브리핑해 주는 등 기관 간 신뢰 유지가 관건”이라며 “보안 누설이나 조직 간 갈등이 생겨 정보의 질이 낮아지지 않도록 지휘부가 브레이크와 가속 페달을 조절하는 자제력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올해 들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국가’로 규정,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대남 기구를 폐지하고 서해상 도발에 나서는 등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의 안보 역량이 취약해진 틈을 타 간첩 공작 등을 본격 강화하겠다는 의미”라고 우려했다. 게다가 4월 총선을 앞두고 진영 간 갈등과 대립도 고조되고 있다. 간첩망을 통한 요인 암살이나 폭력적 파괴 행동 같은 후방교란 도발을 벌일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9·11테러 사건에서 보듯 안보의 최전선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국민 희생이 따르는 대형 안보사건으로 비화할 수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글=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윤지수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