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힐링산행
그는 줄곧 가야산에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 10여년간 “고운(최치원) 선생을 따라 들어가겠다”고 말해왔다. 신유한(1681~1752). 영조도 “정말 문장을 잘하는 자”라며 칭찬한 조선 시대 최고의 문장가 중 한 명이다.
기자는 줄곧 가야산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이번에 간다”고 하니, “그 먼 곳에 왜 가느냐”는 답부터 들었다. “겨울엔 가야산에 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최치원, 해인사 10년간 머물며 『부석존자전』 등 써
지난달 5일 이른 아침. 가야산 해인사에는 숨소리마저 들릴 고요함이 절 마당 깊이 깔렸었다. 하나 둘 셋, 다시 하나 둘 셋. 좌우 번갈아 셈하며 스님이 쓰레질했을까. 단정한 절 마당에 이변을 일으킬까 싶어 한 발 내딛기조차 조심스러웠다. 대적광전을 바라보고 한가운데에 위치해야 한다는 상식은 버리고 두 발 정도 벗어난 삼층석탑 위로, 장경판전의 연속적인 수직의 창틀 안으로 해가 슬그머니 비칠 때. 그제야 말소리가 들렸다.
“팔공산에서 왔습니다.” 김수경(67·경기도 성남)씨는 어제에 이어 국립공원 두 곳의 꼭짓점에 오르겠다고 왔다. 팔공산(1192m)은 지난달 31일 국립공원 제23호로 승격됐다. 국립공원 지정 연도로 치면, 가야산이 대선배다. 1972년 제9호로 지정됐다. 팔공산 하면 기도도량(祈禱道場) 갓바위다. 가야산 하면 수도도량(修道道場) 해인사다. 그 해인사에 최치원(857~
‘계림의 누런 잎사귀, 곡령의 푸른 솔(鷄林黃葉鵠嶺靑松).’ ‘신라는 망하고 고려는 흥한다’는 뜻의 이 말을 최치원이 신라 왕에게 실제로 전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삼국사기』는 고려 시대 문신 김부식이 지었기에, 승자의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의구심이 든다는 추정도 있다(김정대 경남대 명예교수). 여하튼 왕의 분노를 샀다는 최치원은 그 직후인 898년경부터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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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해인사에서 908년까지 10년간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 등을 썼고, 가야산에서 신선이 돼 올라갔다는 설화를 남겼다. 왜 가야산 해인사였을까.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는 “바로 친형인 승려 현준이 있었다는 인연의 끈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논문 ‘최치원 말년의 역사적 발자취’를 통해 “현준은 신선사상과 도교적 수련의 높은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해인사와 인근 청량사 승려들이 이런 수련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최치원이 ‘가야산 신선이 됐다는 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자는 해인사에서 운전대를 돌려 백운동 방향으로 향했다. 가야산 등산코스는 단출하다. 해인사 아니면 백운동을 들머리로 삼는다.
“대구에서 왔어요.” 그러면서 이 여성은 자신을 김수경(47)이라고 소개했다. 잠깐, 해인사에서도 김수경씨 아니었던가. 골프 선수 호칭으로 하면 김수경1(해인사)과 김수경2(백운동) 되겠다. 김수경1씨가 산행 도중에 해인사 방향으로 돌아가지만 않는다면 김수경2씨와 맞닥뜨릴 수 있겠다 싶었다. 김수경2씨는 최효진(50)·김선희(40)씨와 동행했는데, 어린이집 학부모로 만나 2년 째 산행을 함께하는 중이었다. 이들을 ‘대구 시스터즈’라고 불렀다. “언니, 만물상이 어디래
가야산 만물상(萬物相)은 2010년 6월 개방됐다. 1972년 국립공원 지정과 동시에 출입금지됐다가 38년 만에 풀린 것. 2㎞에 이루는 바위군(群)이 옹기종기 혹은 옥신각신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이 말했다. ‘금강산 만물상은 보는 것이되, 가야산 만물상은 느끼는 것’이라고. 신록의 봄, 단풍의 가을 만물상도 일품이지만, 겨울 만물상은 크로키 작가 앞의 누드모델처럼 단정하고도 당당히 서 있다. 수풀이 사라진 철, 가리지 않아 더 아름다운 것. 그래서 겨울엔 가야산에 가야 한다.
산행하다 보면 다른 일행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시흥에서 온 친형제 김모씨 일행도 그랬다. 이들을 ‘시흥 브라더즈’라고 하자. 따라가고 따라오기를 반복했다.
조선 최고 문장가 중 한 명 신유한은 백련암서 학업
조선의 신유한은 1000년 가까이 앞서 간 최치원을 따라 가야산으로 향한다고 했다. 왜였을까
신유한은 18세기 유행하던 송문(宋文)과 당시(唐詩)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 하지만 지방 수령의 관직에 머물렀다. 서얼이었기 때문이다. 최치원도 6두품, 둘 다 태생적인 한계를 벗어나고 싶었으나 좌절된 공통점이 있었다. 하 교수는 “신유한은 자신과 최치원의 삶을 일치시킴으로써 마음의 위로를 얻고, 또 (신선이 됐다는) 최치원의 삶에서 초월의 가능성을 발견한 게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신유한은 가야산 자락이 이어지는 고령 쌍림에서 최치원을 사모한다는 뜻의 ‘경운재(景雲齋)’를 짓고 ‘가야초수(伽倻樵叟·가야의 늙은 나무꾼)’를 자처했다. 72세. “나는 떠난다”라던 그날, 바람처럼 세상을 떠났다.
바람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지나온 만물상을 뒤돌아본 대구 시스터즈와 시흥 브라더즈는 “만물상이 오만상이 됐구나”라며 농을 했다. ‘오만’은 경상도 말로 ‘온갖’의 뜻이기도 하다. 대구 시스터즈는 온갖 모양이 더 잘 보인다는 뜻으로, 시흥 브라더즈는 추위로 얼굴을 찌푸린다는 의미로 말했을까.
가야산성의 서쪽 문이 있었다는 ‘서성재’를 지났다. 성은 한참 전에 무너져 돌무더기만 남기고 있다. 바람은 더 거세졌다. 가야산의 주봉은 상왕봉(1430m)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웃한 칠불봉(1433m)이 살짝 높다. 상왕봉은 경남 합천군에서, 칠불봉은 경북 성주군에서 각각 주봉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형식이야 아무렴 어떤가. 손명래(1644~1722)가 문장의 형식에 연연하지 않던 신유한을 옹호했다. “시대에 따라 문장은 변하기 마련이네
신유한은 젊은 시절 가야산 해인사 부속암자인 백련암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학업에 몰두했고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그 백련암에서 내려왔을까. 보살 한 명이 해인사 사리탑 앞에서 깊이 고개 숙여 기도하고 있었다.
첨언: 김수경1씨와 김수경2씨는 결국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