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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쏭런위미(鬆仁玉米)와 옥수수(玉米) 천로역정

중앙일보

입력

쏭런위미는 옥수수와 잣, 그리고 피망 등의 채소를 볶은 요리다.

쏭런위미는 옥수수와 잣, 그리고 피망 등의 채소를 볶은 요리다.

쏭런위미(鬆仁玉米)는 옥수수(玉米)와 잣(鬆仁), 그리고 피망 등의 채소를 볶은 요리로 주재료는 옥수수다. 이 음식, 흔히 동북요리로 알려져 있다. 옥수수와 잣의 주산지가 옛날 만주, 지금의 동북 3성인 까닭이다. 바꿔 말해 다른 중국요리에 비해 뿌리도 깊지 않고 계보 찾기도 어렵다.

이런저런 이유로 쏭런위미는 대중 음식점에서 주로 먹는 요리이고 그중에서도 값이 저렴한 편이다. 다시 말해 맛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서민 음식이다.

쏭런위미, 대중적 음식이지만 재료 명칭을 조합해 지은 요리 이름은 그럴듯하다. 잣나무 씨앗인 쏭런(鬆仁)은 특별할 게 없지만 옥수수인 위미, 즉 옥미(玉米)는 곡식 이름치고는 최고의 찬사다. 쌀(米)은 쌀인데 옥(玉)처럼 보석 같은 쌀이라는 의미다.

중국인들, 옥수수 낱알에 왜 이런 거창한 작명을 했을까? 물론 생김이 옥을 닮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옥수수의 중국어 어원을 알아보면 뜻밖의 전파경로와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우리말 옥수수와 강냉이의 어원을 곁들이면 흥미가 한층 더해진다.

옥수수의 원산지는 아메리카다. 그러니 15세기 말인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을 거쳐 아시아로 퍼졌다. 중국에는 대략 16세기 중반에 전해진 것으로 본다. 명나라 때인 1560년에 발행된 지방 관청의 일지인 『평량부지(平凉府志)』에 옥수수 관련 기록이 보인다. 평량은 간쑤 성 성도인 란주 동쪽에 위치한 곳이니 실크로드의 연장선에 있었던 지역이다. 여기에 번맥(番麥) 혹은 서천맥(西天麥)이라고 나온다. 번맥은 외국에서 들여온 밀, 서천맥은 서역에서 전해진 밀이라는 뜻이다. 당시에도 서역은 낯선 곳이고 신비한 땅이었으니 그만큼 특별한 작물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일설에는 실크로드를 따라 메카에 성지순례를 다녀온 회교도가 씨앗을 가져와 심었다는 설도 있다.

그만큼 보기 드물었던 식물이었기 때문인지 옥수수는 중국 내륙으로 전해지면서 그 이름이 점입가경으로 바뀐다. 처음에는 별칭이 연미인(燕美人)이었다. 간쑤성에서 그다음으로 퍼진 지역이 산시성 일대였고 이 지역을 옛날 연(燕)이라고 했으니 그곳의 미인처럼 예쁜 작물이라는 뜻일 것이다.

옥수수를 미인에 비유했던 이유는 또 있다. 중국에서 옥수수는 처음 식용이 아닌 관상용 화초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서역에서 전해진 희귀식물이었으니 일반 가정집에서 키우는 여느 화초와 달리 황실 정원의 관상식물이었다. 그래서 옥수수를 옥처럼 생긴 쌀이라는 뜻의 위미와 발음이 같은 위미(御米)라고도 했는데 말하자면 황제의 쌀이라는 뜻이다.

옥수수 하나 갖다 놓고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을까 싶지만 이유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명나라 후반 의학서 『본초강목』에는 “종자가 드물다(種者也罕)”고 나온다. 옥미(玉米)라는 이름 역시 명나라 말 문헌인 『농정 전서』에 처음 보인다. 옥수수 열매가 구슬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흔치 않았기에 미화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명나라 말까지 옥수수는 중국에서 아직 널리 퍼지지 못했다.

옥수수가 중국 전체로, 그리고 황실 정원 화초에서 농민 서민의 식량이 된 것은 청나라 이후다. 먼저 재배지역이 간쑤와 산시, 허베이 성 등 서북에서 양자강 넘어 중국 강남인 호남과 강서 일대까지 넓어졌다. 그러면서 강남 현지에서는 부르는 이름부터 달라졌던 모양이다. 조선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옥수수를 옥촉서(玉蜀黍)라고 부른다고 했다. 서(黍)는 기장이라는 뜻의 한자이니 촉서(蜀黍)는 사천을 중심으로 하는 촉나라 기장이라는 의미다. 서민의 양식이 되면서 옥미가 촉나라 기장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촉서를 중국어로 발음하면 수수(shushu)다. 그렇기에 우리말 수수의 어원을 촉서, 옥수수의 어원을 옥촉서에서 찾기도 한다. 또 조선 순조 무렵 문헌인 『낙하생집』에는 중국 영남(嶺南)인 광둥 광서 일대에서는 옥수수를 ‘강남의 수수(江南薥黍)’로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이 말이 줄어 우리말 강냉이가 됐다는 어원설도 있다.

옥수수는 우리나라에 조선 정조 무렵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는데 앞서 어원설이 맞는다면 중국 북방이 아닌 양자강 일대 화동지역을 통해 전해졌을 것이다. 중국에서 옥수수가 이미 농민의 작물, 서민의 식량이 됐을 무렵이다.

그래서인지 다산 정약용은 옥수수를 곡식 중 제일 형편없는 작물로 꼽았고 추사 김정희는 일흔살 노인이 옥수수를 먹으며 연명한다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의 대중 음식 쏭런위미를 말하려다 이야기가 한참 옆길로 샜지만 조선과 중국의 옥수수 전파 과정을 보니 맛있는 쏭런위미가 왜 값싼 서민 음식이 됐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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