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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주4일 야근' 판사의 돌연사…"사무실 보존하라" 고법 지시

중앙일보

입력

윤준 서울고등법원장이 지난해 10월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준 서울고등법원장이 지난해 10월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1일 돌연 사망한 고(故) 강상욱 서울고법 판사(47·사법연수원 33기)의 격무를 입증하기 위해 사무실 현장을 법원이 보존 조치했다.

18일 법원 등에 따르면, 윤준 서울고등법원장은 강 판사의 죽음 직후 “고인의 업무 현장을 보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강 판사는 11일 저녁 식사 후 대법원 구내에서 운동하던 중 갑자기 사망했다. 이후 사무실에 복귀해 야근을 염두에 둔 듯 책상에 자신의 지갑을 두고, 컴퓨터도 켜 놓은 채였다고 한다.

서울고법은 이렇게 남겨진 업무 현장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강 판사와 함께 민사 24부(가사 2부)에서 근무했던 동료 판사의 입회하에 컴퓨터 로그인 기록 및 각종 자료도 선별해 보관하기로 했다. 서울고법의 조치는 강 판사의 죽음에 ‘과로사’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한 것이다. 만약 유족 측이 인사혁신처를 상대로 공무상 재해로 인한 순직을 다툴 경우, 관련 자료를 넘겨주겠다는 취지다.

법원 2주간 휴정기 돌입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전국 법원이 겨울 휴가철을 맞아 2주간 휴정을 시작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서울고법을 비롯한 전국 대부분의 법원이 내달 5일까지 휴정기에 들어간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 2023.12.26   jjaeck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법원 2주간 휴정기 돌입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전국 법원이 겨울 휴가철을 맞아 2주간 휴정을 시작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서울고법을 비롯한 전국 대부분의 법원이 내달 5일까지 휴정기에 들어간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 2023.12.26 jjaeck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0년부터 서울고법에서 근무한 강 판사는 ‘사건을 남겨두지 않는 판사’로 법원 내부에서 유명했다. 동료 판사들은 강 판사에 대해 “대법원 재판연구원 시절에도 ‘미제 사건 0건’의 신화를 달성했을 정도로 직업의식이 투철했다. 최근의 재판 지연 사태와는 대척점에 섰던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강 판사는 이를 위해 밤낮없이 근무했다. 서울고법 코앞에 살면서 주 4일을 꼬박 야근하고, 퇴근 후에도 기록을 가져가 챙겨보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최근엔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 2심도 맡고 있었다.

유족 측은 실제 공무상 재해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유족 측은 “남겨진 아내와 어린 자식들 때문이라도 공무상 재해에 따른 유족급여 신청을 할 것”이라며 “휴대폰을 살피니 주 5일 중에 4일 저녁을 사무실로 배달음식만 시켜먹었던 흔적이 남아있을 정도로 늘 격무에 시달렸다”고 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고법 내부에선 강 판사 죽음을 계기로, 격무를 요구하면서도 보상은 없는 현행 인사 제도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판사는 “강 판사가 이렇게 황망하게 떠날 것을 뭐를 위해 그리 열심히 일해야 했던가 애석하다”고 했다. 이어 “2011년 고법 판사 선발제 이후 고법 판사는 고법에 전속된 구조다 보니 강도 높은 근무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는 시스템”이라며 “반면 승진 기회나 보상은 거의 사라져 오직 소명 의식으로 일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큰 사건의 2심이 몰리는 고법은 지방법원보다 업무량이 더욱 과중한 편이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도 지난 15일 취임사에서 “지난주 철두철미한 업무처리로 정평이 난 판사 한 명이 과로 속에 급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했다”며 “늦은 시간이나 휴일에도 근무하는 법관의 희생과 헌신이 당연시되는 제도와 인식 아래 선진사법의 미래는 올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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