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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원에 초고속 '출마용 책'…출판회 열어 수억 '수금'했다 [총선용 출마의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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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공직자 사퇴 시한(선거 90일 전, 1월 11일) 직전에 사표를 제출하고 총선 출마를 선언한 관료 출신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출마 선언과 동시에 출판기념회를 연다는 점이다.

경기 수원병에 도전장을 낸 방문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임 사흘만인 7일 자서전 『매산동 꼬마의 꿈』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4일 이임사에서 “짧은 작별의 순간을 맞아 죄송하다”라고 했지만 약 300쪽 가까운 책에는 방 전 장관의 유년 시절부터 35년의 공직 경험, 수원 발전에 대한 포부가 담겼다. 지난달 28일 공직에서 물러난 정황근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도 지난 7일 출판기념회를 열고 충남 천안을 출마를 선언했다. 세종을에 출마하는 이기순 전 여성가족부 차관도 지난 9일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차관에서 물러난 지 12일 만이었다.

정치인 출판기념회에서 봉투에 현금을 넣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정치인 출판기념회에서 봉투에 현금을 넣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서적 출간은 하루 이틀에 뚝딱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본인의 경험담을 녹여내는 자서전이라 해도 집필 → 편집→인쇄 등에는 최소한 서너 달이 소요된다. 그렇다면 관료 출신 총선 출마자들은 어떤 비법으로 책을 출간할 수 있었을까.

“10명 중 9명은 도움받아”…공공연한 대필 관행

공직에서 바로 선거에 도전한 이들이 200~300쪽 분량의 자서전을 만드는 데는 출판사와 대필 작가의 도움이 필수라는 게 정치권의 정설이다. ‘시간이 돈’인 정치인들이 A4용지 100장 분량 (약 300쪽 기준)의 원고를 직접 쓰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전직 의원은 “도저히 책을 쓸 시간이 없다. 정치인은 10명 중 9명은 보좌진이든 대필 작가 도움을 받아서 책을 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총선에 출마하는 한 관료 출신 예비후보자도 “공직에 있을 때 쓴 기고문과 인터뷰, 메모 등을 토대로 책을 출간하지만 혼자 힘으로 책을 낸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방문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7일 경기 수원시 경기아트센터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다. 방문규 예비후보

방문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7일 경기 수원시 경기아트센터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다. 방문규 예비후보

대필 작가 섭외는 대필작가협회나 선거 기획사, 출판사 등에서 소개를 받는 게 일반적이다. 2015년 비영리법인 인가를 받은 한국대필작가협회에 따르면 15~20명의 A급 대필작가가 활동 중이며 이번 총선을 앞두고 15개 지역의 18명의 예비후보로부터 대필 의뢰가 들어와 책을 출간했다고 한다. 업계에선 A급 대필 작가의 경우 원고료만 1000만원부터 시작하는데, 의뢰하는 정치인의 정치적 중량감이나 요구하는 책의 완성도에 따라 4000만원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대선 후보의 경우엔 비용이 더 올라간다고 전했다.

업계에선 투입되는 작가 수에 따라 빠르면 한 달 만에도 책 출간이 끝난다고 한다. 책의 내용은 비슷한 패턴을 띤다. 성장 과정→상처와 역경→정치 투신 계기→지역 포부 등이 기본 골격이다. 출마자의 과거 인터뷰·기고문이 있거나 사진 자료가 풍부하면 작업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대신 기초 자료가 없을 경우 심층 인터뷰를 포함한 구술 작업을 고려하면 3~4달의 작업 시간이 걸린다.

대필 작가 10년 차인 A씨는 “과거 중진 의원의 자서전 출간을 도왔는데, 3명이 넘는 작가가 붙어서 한 달 만에 책을 완성했다”라며 “작가들은 힘들었겠지만, 의뢰인 입장에선 돈만 있으면 일도 아니다”고 말했다. 15년 경력의 대필작가 B씨는 “출판기념회가 목적이라 의뢰인들이 책 자체의 재미나 의미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라며 “ ‘내가 왜 인터뷰를 해야 하나. 주는 자료대로 알아서 써오라’고 하면서 갑질을 하거나 원고 완성 후 약속한 금액을 못 주겠다고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통상적으로 전·현직 의원은 의정보고서와 보도자료, 사진, 기존 언론 보도 등으로 자서전을 채운다. 이달 초 300쪽 분량의 자서전을 낸 한 비례대표 의원은 의정활동 성과를 안내하면서 상임위·본회의장 질의 사진뿐만 아니라 자신이 개최한 세미나의 포스터까지 담았다. 수도권에서 기초자치단체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C씨는 지난해 펴낸 400여쪽 분량의 자서전 중 약 40쪽을 ‘000의 시간’이라며 유년시절부터 정치인 활동 당시의 모습을 담은 화보집으로 꾸몄다. 전직 보좌관은 “의원 부탁으로 자서전 초고를 쓴 적도 있다”며 “평소 의원이 했던 인터뷰와 언론 기고문, 보도자료를 토대로 보름 만에 200쪽 분량의 원고를 썼다”고 말했다.

17일 국회 의원회관의 의원도서관에 전시된 현역 의원들의 자서전. 이창훈 기자

17일 국회 의원회관의 의원도서관에 전시된 현역 의원들의 자서전. 이창훈 기자

선거를 앞두고 ‘뚝딱’ 만들어진 책이지만 출판기념회에선 불티나게 팔린다. 책 정가는 보통 2만원 안팎이지만 출판기념회에선 최소 한 권에 5만~10만원 혹은 그 이상을 현금으로 사 가는 게 관행이라고 한다. 특히 현직 의원의 출판기념회에는 상임위 유관기관이나 기업의 대관 담당자가 대거 찾아와 눈도장을 찍고, 책을 사 가느라 문전성시를 이룬다. 대필 작가 원고 비용과 2000만원가량의 책 출간 비용을 따지면 출판기념회 한번에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억 단위의 돈을 남길 수 있다.

출판기념회 지나면 증발하는 자서전, ISBN·납본 안 해

선거를 앞두고 출간된 정치인 자서전은 정식으로 유통되지 않는 경우도 잦다. 국립중앙도서관 납본(의무 제출)도 하지 않아 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실상 수금(收金) 목적의 일회성 출간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경기도의 한 기초단체장을 지낸 박모 씨는 지난 6일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열었지만, 정작 박씨의 책은 시중에서 찾을 수 없다. 국제표준도서번호(ISBN)을 받지 않아서다. ISBN을 발급받지 않으면 온·오프라인 서점 유통망을 통한 판매가 불가능하다. 박씨는 “책을 급하게 만들다 보니 완성도가 낮아 시중에 팔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라며 “출판기념회에 온 분들 상대로만 팔았다. 혹시 책이 필요하면 우편으로 보내드리겠다”고 말했다.

2020년 총선에서 경기 지역에 출마한 강모 씨의 책은 여전히 미납본 상태였다. 납본은 출판물의 영구 보존을 위한 제도로 새로 출간된 도서는 30일 이내에 국립중앙도서관에 의무적으로 제출해 납본 절차를 마쳐야 한다. 강씨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납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판매용이 아니라서 납본을 안 한 거 같다”라며 “출판사를 통해 판매한 게 아니라 가진 재고도 없다”고 말했다.

대필 작가 D씨는 “ISBN을 발급 받지 않고 자서전 계약을 하는 경우가 많다”라며 “내용도 부실하지만 과거 ‘돼지 발정제’로 곤욕을 치른 홍준표 대구시장처럼 자서전 내용 때문에 발목 잡힐까 봐 정식 유통을 꺼리는 정치인도 많다”고 말했다.

‘수금’엔 여야 한마음…21대 국회, 출판기념회 규제법 발의 無

출판기념회 후원금 이미지. 중앙포토

출판기념회 후원금 이미지. 중앙포토

정치권에서 출판기념회는 사실상 ‘정치자금 수금회’로 변질된 지 오래지만 자정 작용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과거엔 출판기념회 양성화를 위한 법안 발의라도 있었지만 21대 국회 땐 아예 그러한 시도조차 사라졌다.

중앙일보가 17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확인한 결과 출판기념회 규제를 위한 법안 발의는 21대 국회에서 단 한 건도 없었다. 정치자금법·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각각 73건, 510건에 달했지만 여야 모두 음성적인 정치자금 통로를 막는 출판기념회 관련 법안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은 것이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정치 후원금에 대해 세세하게 규제하고 있지만 후원금을 ‘후원회에 기부하는 금전이나 유가증권 그 밖의 물건’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쉽게 말해 출판기념회에서 책을 팔아 얻는 돈을 저술 활동을 통해 버는 수입으로 치부해 규제 대상에서 아예 제외하고 있는 것이다. 규제 대상이 아니니 얼마를 벌었는지 알릴 공개 의무도 없다. 출판기념회에 관한 유일한 규제는 ‘선거일 90일 전부터 선거일까지 출판기념회를 열지 못한다’는 공직선거법 103조 5항 규정뿐이다.

그래도 과거엔 자정 시도가 있었다. 19대 국회였던 2014년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던 신학용 전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전신) 의원이 법안 발의 대가로 출판기념회에서 유관 단체로부터 금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게 발단이었다. 이른바 ‘입법 로비’ 사건으로 번지면서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보수혁신위원회는 국회의원, 지방의원, 지방자치단체장 등 공직 선거 후보자가 되려는 사람의 출판기념회를 전면 금지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새누리당 의원 153명 명의로 출판기념회 전면 금지 법안을 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같은 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책을 정가에만 판매하도록 하는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이 또한 여야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장진영 기자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장진영 기자

20대 국회 때는 2018년 8월 정종섭 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이 “출판기념회의 의미를 넘어 음성적으로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며 출판기념회 사전 신고 및 판매 제한, 수입·지출 내역 보고 등의 규제를 강화하는 정치자금법·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정치개특별위원회를 거쳐 행정안전위원회로 법안이 넘어가기만 하고 소위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이런 사이 잡음은 계속됐다. 노영민 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2015년 10월 시집 출판기념회를 연 뒤 같은 해 12월 출판사 카드 단말기를 의원실에 설치해 피감기관으로부터 시집을 팔아 물의를 빚었다. 결국 노 전 의원은 이듬해 열린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게 됐다. 최근 뇌물·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검찰 압수수색 당시 자택에서 나온 현금 3억원에 대해 “출판기념회 때 남은 돈과 아버님 조의금”이라고 해명해 논란을 키우기도 했다.

조진만 덕성여대(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뻔히 개선 방안이 있는데 매번 국회 논의가 중단되는 걸 보면 기득권을 가진 국회의원의 전략적 공생만 강화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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