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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학대 증거 잡으려 '몰래녹음'…이렇게 해야, 불법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세종시의 한 초등학교 교실. 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연합뉴스]

세종시의 한 초등학교 교실. 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연합뉴스]

“아동학대 정황이 있다면 녹음도 필요하지 않나요. 아이 말만 듣고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정확하게 알 순 없어요.” (5세 자녀를 둔 오모씨)
“선생님이 툭하면 소리 지른다는데 아이는 구체적으로 말을 못 하고, 가방에 녹음기 넣어 보내고 싶죠.” (아동학대방지 카페 회원 A씨)

지난 11일 대법원이 내놓은 ‘수업 중 몰래 녹음은 불법’이란 판결이 부모들 사이에서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한 부모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자녀의 가방에 몰래 녹음기를 넣어 교사가 교실에서 한 말을 녹음했는데, 불법 녹음이라며 아동학대 재판의 증거로 쓸 수 없다는 판결의 요지였다.

웹툰작가 주호민씨도 자녀에게 녹음기를 들려 보냈다. 수원지법은 특수교사 A씨 사건에서 녹음된 내용을 재생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대법원 선고 나흘 뒤인 15일 열린 재판에선 이 녹음파일을 증거로 쓸 수 있는지를 두고 변호인과 검찰이 공방을 벌였다.

아들의 특수 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했던 웹툰 작가 주호민씨가 지난해 7월 인스타그램에 올린 입장문. 확인이 필요해 녹음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인스타그램 캡쳐]

아들의 특수 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했던 웹툰 작가 주호민씨가 지난해 7월 인스타그램에 올린 입장문. 확인이 필요해 녹음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인스타그램 캡쳐]

대법원 판결은 최고법원 판례로 하급 법원에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11일 판결의 취지가 ‘부모에 의한 녹음을 전면 금지’한 건 아니다. 수업이란 건 부모가 참여하지 않은 교사와 그 반 학생들 간의 대화(=‘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 대화’)여서 이를 부모가 자녀를 시켜 몰래 녹음한 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라고 본 것이다.

부모 몰래 녹음 인정한 사례도…“아기에 한 말 ‘대화’ 아니다”

부모가 한 몰래 녹음이 증거로 인정되는 경우들도 있다. 우선 말을 아예 못 하는 어린 아기의 경우다. 대법원은 생후 10개월 된 자녀를 아이 돌보미에게 맡기며 부모가 몰래 녹음한 것을 증거로 인정해 아이 돌보미의 아동학대를 인정한 바 있다. 생후 10개월은 언어능력이 온전히 발달하지 않아 돌보미가 하는 말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대화’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이다. 대구지법에서 2019년 1월 판결한 내용을 대법원에서 같은 해 6월 확정했다.

4~5세, 7~8세, 아이들에게 엄마가 욕설하는 걸 아빠가 몰래 녹음한 것을 증거로 인정한 사례도 있다.‘XX가리 새끼들, 너네들 들어오지 마’ ‘엄마가 화나면 죽여버릴지 몰라’ 등이 녹음됐는데, 법원은 “비명이나 탄식은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타인 간의 ‘대화’가 아니다”고 봤다. “피해 아동은 자신을 방어하거나 상황 표현능력이 부족해 학대의 의심을 품은 부모로선 몰래 녹음 외에는 증거 수집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점도 고려했다. 2022년 9월 울산지법 판결로 두 달 뒤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대법원 전경. [뉴스1]

대법원 전경. [뉴스1]

대화 가능한 자녀라면…“학생이 직접 녹음해야”

그렇다면 자녀가 ‘자신을 방어하거나 상황 표현능력이 있는’ 정도로 언어능력이 발달했다면 어떨까. 부모가 한 몰래 녹음은 지난 11일 대법원 판결 속 사건처럼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아이는 자신에게 녹음기를 들려 보내는 부모에게 “녹음하지 마세요” “삭제하세요” “왜 자꾸 저거 켜는데요” 등의 말을 할 줄 알았다.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연령이기도 하다. 대법원은 “아동의 연령, 녹음한 부모가 아동의 친권자란 사정을 고려해도 부모는 아동과 별개의 인격체”라고 했다.

이 경우 부모가 아닌 자녀가 스스로 녹음하는 것은 증거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교실에서의 수업은 부모 입장에선 ‘타인 간 대화’지만 자녀 입장에선 ‘자신이 당사자로 참여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녹음기를 켜라고 부모가 시킨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번 대법원 사건에서 변호인은 “녹음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부모의 지시에 따라 아동이 직접 녹음할 능력은 있었으므로 부모가 녹음할 필요는 없었다”는 주장도 했는데, 이는 아동의 직접 녹음은 증거로 쓸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만 자녀가 직접 녹음하는 경우라도 교권침해 소지는 유의해야 한다. 교육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전경석 변호사(법률사무소 오율)는 “교육활동 중인 교원의 음성을 무단으로 녹음해 배포하거나 이를 가지고 무리한 민원을 제기하면 교육활동 침해가 될 수 있다”면서 “다만 교원의 언행이 교육활동이라기보다는 아동학대에 가깝다면 당사자인 학생이 몰래 녹음해 아동학대 신고를 하는 것은 교육활동 침해행위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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