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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최제우 탄생 200주년을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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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새해를 맞아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운 최제우다. 1824년 12월 18일 경주에서 태어났으니 탄생 200주년이 된다. 최제우의 삶과 사상을 10여 년 전 『시대정신과 지식인』이란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다. 유학자 이건창, 독립운동가 서재필, 승려 경허와 함께였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네 지식인은 다른 길을 걸었다. 이건창이 양명학을 바탕으로 자주적 발전을 꿈꿨다면,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추구했다. 경허는 선불교를 중흥시켜 근대 불교를 열었다. 그리고 최제우는 동학을 창도해 민족 사상과 동학농민혁명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수운 최제우가 남긴 사상적 유산
인간주의, 평등주의, 공동체주의
21세기의 문명사적 대격변 맞아
의미와 의의를 새롭게 성찰해야

최제우가 활동했던 19세기 중후반은 ‘서세동점’의 문명사적 대전환기였다. 과학기술과 제국주의를 앞세운 서양 세력들은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넘어 머나먼 동쪽 나라들까지 몰려 왔다. 두 차례의 아편전쟁, 청·일본·조선의 개항은 대전환기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들이었다. 동아시아는 전통에서 근대로 가는 시대교체의 황혼 속에 놓여 있었다.

최제우는 당대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와 다른 제3의 사상적 거점을 세웠다. ‘시천주(侍天主)’는 그 거점의 핵심을 이룬다. 시천주는 내 마음속 천주, 즉 한울님을 모시고 섬긴다는 의미다. 이 시천주는 사람 섬기기를 하늘처럼 하라는 최시형의 ‘사인여천’과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손병희의 ‘인내천’ 사상으로 발전했다.

최제우 사상에는 민족주의·인간주의·해방주의가 숨 쉬고 있었다. 동학은 서양의 물질적·정신적 팽창에 맞서려는 민족주의 성향을 담고 있었다. 또 인간 존엄과 평등에의 열망을 품고 있었다. 최제우가 여자 노비 두 명을 각각 며느리와 수양딸로 삼은 일화는 그의 사유와 실천을 증거했다. 나아가 혼란의 ‘선천’이 끝나고 희망의 ‘후천’이 열린다는 최제우의 ‘후천개벽’ 사상은 새로운 해방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동학의 역사성이다. 19세기 중후반 서양을 대표했던 사상가가 존 스튜어트 밀과 카를 마르크스였다면, 우리에게는 서재필과 최제우가 있었다. 21세기의 시점에서 밀과 마르크스 사상에 성취와 한계가 존재하듯, 최제우 사상에도 낡음과 새로움이 함께 깃들어 있다. 최제우가 열망했던 인간주의·평등주의·공동체주의는 인류의 ‘오래된 미래’라 할 수 있다.

둘째는 동학의 현재성이다. 2024년 현재 우리 사회에는 선진국의 문턱에 올라섰다는 자부심과 지금이 ‘피크 코리아’일 것이라는 우려가 공존한다. 지속가능한 선진국을 일궈가기 위해선 혁신성장과 불평등 완화의 제도개혁이 중요하다. 더하여 의식과 가치와 문화의 선진화가 요구된다. 진정한 선진국이라면 생각부터 선진국다워야 한다. 생명을, 자신을, 타자를 존중하는 생명주의·인본주의·이타주의의 씨앗을 최제우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21세기 현재의 세계사회는 대격변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전쟁과 평화, 혁신과 퇴보, 이성과 욕망의 대결 아래 인공지능·플랫폼·집단지성이 이끄는 ‘트리플 혁명’,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즘, 자연의 복수를 예고하는 기후위기는 대격변을 상징한다. 2020년대 현재 대서양의 표준이 퇴색하고, 팍스 아메리카나와 팍스 시니카가 충돌하는 태평양의 표준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 교차로에 우리나라가 서 있다고 봐야 한다.

‘동도서기(東道西器)냐, 서도서기(西道西器)냐’는 동아시아 현대화 200년의 화두였다. 서양의 기술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기술과 조화로울 수 있는 의식·가치·문화의 토대가 동도인가, 서도인가, 동도와 서도의 융합인가는 지난 동아시아 200년의 정신적 과제였다.

‘아시아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서구문화의 미덕을 이루는 개인주의·자유주의·공화주의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서구사회의 한계이자 한국사회의 그늘이라 할 수 있는 약육강식·적자생존·각자도생 문화를 이대로 놓아둘 수 없음을 직시하고 극복해야 한다.

‘전통의 재창조’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미화하려는 게 아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지나간 전통’과 현재의 삶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살아 있는 전통’은 다른 것이다. 연고주의·가부장주의·권위주의의 지나간 전통은 거부하되, 인간주의·생명주의·공동체주의라는 살아 있는 전통을 재발견하고, 이를 개인주의·자유주의·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 가치와 새로운 방식으로 융합하는 것이 선진국 대한민국의 문화적 과제일 것이다.

“나 또한 동쪽 나라 조선에서 태어나 동쪽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는 비록 하늘의 도라 할 수 있지만 학문으로 말하면 동학이라 해야 하느니라.” 최제우의 『동경대전』 ‘논학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평생 서양의 정신과 학문을 공부해온 내게 동쪽의 학문과 실천을 추구해온 최제우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는 감회가 애틋하고 무량하다. 최제우가 남긴 사상적·문화적 유산을 풍성하게 성찰하는 2024년이 되길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