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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선

대사도, 출연진도 같은 ELS 사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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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논설위원

하현옥 논설위원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홍콩 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한 주가연계증권(ELS)의 만기가 속속 도래하며 손실이 확정되고 있다. 지난 8일 이후 확정된 원금 손실률은 48~52% 수준이다. 원금의 절반 정도가 사라진 것이다. 5대 시중은행의 홍콩 H지수 연계 ELS 상품에서 지난 12일까지 발생한 손실액만 1000억원이 넘는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손실액 쓰나미’의 서막에 불과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홍콩 H지수 연계 ELS의 판매 잔액은 19조3000억원이다. 전체 잔액의 79.6%인 15조4000억원이 올해가 만기인 상품이다. 특히 상반기에 만기가 돌아오는 판매액만 10조2000억원에 이른다. 홍콩 H지수가 현재와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면, 전체 손실액은 3조~5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ELS는 기초자산인 주가지수나 특정 종목의 주가 움직임에 따라 수익과 손실이 결정된다. 2~3개의 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해 만기(3년) 중 6개월마다 조기상환 조건을 충족하면 약속한 수익률을 지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저금리 시절, 예금보다 높은 금리를 주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중금리 상품으로 여겨져 ‘국민 재테크’로 시장에서 인기를 끌어왔다.

 하지만 기초자산인 홍콩 H지수가 급락하며 투자는 악몽이 됐다. 2021년 2월 1만2229까지 치솟았던 홍콩 H지수는 2022년 10월(4939) 59.6% 급락했다. 지난해 1월 7480선까지 올랐지만 다시 하락세를 이어가며 지난 12일 5481.94를 기록했다.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손실 폭탄’이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뒤 벌어지는 양상은 데자뷔 그 자체다. 수익만을 좇아 고객의 피해나 손실을 등한시하는 금융회사의 행태는 여전했다. 은행 직원은 “중국이 망하지 않는 한 홍콩 H지수가 반 토막 날 가능성은 없다”며 투자를 권했다. 이 말은 원금 손실률 최대 98%를 기록한 2019년 독일 국채 금리 연계형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와 겹쳐진다. 당시에도 “독일 국채 금리가 -0.2% 아래로 떨어진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지만, 불행히도 독일 국채 금리가 -0.6% 이하로 떨어지며 원금은 모두 날아갔다.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에도 초위험 상품인 ELS에 가입하도록 고객의 투자성향 등급을 올리고, 은행 직원이 중도해지를 못 하게 회유했다는 주장과 제보·고발도 이어진다. 복잡한 금융상품을 이해하기 어려운 고령자에게 예금보다 더 나은 상품이라며 ELS 가입을 권유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 65세 이상 고령투자자의 투자액은 전체 잔액의 30.5%인 5조4000억원이고, 90대 투자액도 90억8000만원에 이른다.

금융사 불완전판매 제보 이어져
투자자들은 속았다며 배상 요구
당국 뒷짐지다 뒤늦게 감독 법석

 은행의 핵심성과지표(KPI)에 고위험 ELS 상품 실적을 포함해 판매 확대를 유도한 정황도 파악됐다는 게 금감원 주장이다. 비이자 수익 비율을 높이려 ELS 판매 한도 내부 규정을 바꿨다는 보도도 나왔다. 홍콩 H지수 연계 ELS 금액의 82.1%가 은행에서 팔린 이유다.

 다시금 드러난 금융사의 민낯만 데자뷔는 아니다. 투자의 자기책임 원칙을 방기한 채, 금융사의 불완전판매를 주장하며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투자자도 달라지지 않은 그대로다. 본인 돈을 굴리는 일임에도 “은행에서 통장으로 주면 다 예금으로 안다”라거나 “H지수가 뭔지도 몰랐다”며 속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과거 ELS 투자 경험이 있는 가입자는 10명 중 9명(91.4%)이다. 조기상환 등으로 이익을 봤을 때는 침묵하다가 손실이 생기자 불완전판매에 당했다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ELS는 예·적금이 아니라 자기 책임 하에 드는 금융상품인 만큼 투자자도 책임져야 할 부분이 당연히 있다”며 “DLF나 사모펀드와 같은 사기성 상품과 같이 볼 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과도한 투자자 보호에 나서는 당국의 모습은 금융 시장을 왜곡할 수 있다. 게다가 “H지수는 등락이 극심하고 원금 손실이 발생한 전례가 있다”며 금융회사에 직격탄을 날렸지만, 공모 ELS의 주요 지수로 H지수를 허용한 건 금융 당국이다. 책임 없는 듯, 약자의 편에 선 듯 뒤늦게 감독에 나선 당국의 모습도 예전과 같다.

 불완전판매 등 금융사의 과실이 인정되면 확실한 배상 및 법적 책임을 지워야 한다. 투자자도 본인의 투자 결정에 따른 손실 등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당국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DLF, 사모펀드, ELS로 제목만 다를 뿐 대사도 주연 배우도 같은 극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