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2035

성난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성지원 기자 중앙일보 기자
성지원 정치부 기자

성지원 정치부 기자

기자가 된 후 변한 게 있다면 욕설에 익숙해졌다는 점이다. 입사 1년 차엔 “대한해협에 빠져 죽어라”는 이메일을 받고 하루종일 심란했던 적이 있다. 며칠 후 “네 집을 아니까 찾아가서 죽이겠다”는 적극적 협박 메일을 받고서야 대한해협을 잊을 수 있었다. 입사 7년 차인 지금은 유튜브에 신상이 떠돌고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일도 무뎌졌다.

그런데도 아직 기사 댓글 창을 열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에 분노하는지 새삼 놀란다. 특히 정치 기사에선 욕 없는 댓글을 찾기가 힘들다. 얼마 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 기사를 쓰고 댓글을 봤다가 깜짝 놀랐다. “아깝다”는 댓글이 너무 많아서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일 부산 강서구에서 지지자로 위장한 남성에게 흉기로 피습당했다. [뉴시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일 부산 강서구에서 지지자로 위장한 남성에게 흉기로 피습당했다. [뉴시스]

누군가 ‘죽지 않아 아깝다’는 무시무시한 생각. 곰팡이처럼 번진 댓글 창의 분노는 언제 어디서 또 다른 테러를 불러낼지 모른다. 지난해 이 대표의 단식장 앞에서 50대 여성이 쪽가위로 경찰을 찔렀고 70대 남성이 커터칼을 휘둘렀다. 그즈음 대구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폭탄 테러를 암시한 20대도 있었다. 누구보다 시민과 소통해야 할 정치도 테러 앞에 주춤한다. 최근 한 의원은 “행사장에서 갑자기 다가오는 지지자를 흠칫 놀라 피했다”고 토로했다.

올해 골든글로브 TV 미니시리즈 및 영화 부문 남우주연상·작품상·여우주연상을 휩쓴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을 보면 제3자를 향한 뒤틀린 분노가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주인공들은 주차장에서 사소한 다툼으로 보복운전을 하고, 이후 끝없는 복수전을 펼치다 끝내 파국에 이른다.

분노의 양상은 파괴적인데, 주인공들 심연의 외로움, 결핍이 처연하게 돋보였다. K장남의 무게에 짓눌려 살지만 잘 풀리는 일 하나 없던 대니(스티븐 연), 잘 나가는 사업가지만 가족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에이미(앨리 웡)는 그 감정을 직면하는 대신 제3자인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쓴다. 그러다 결국 나락에 떨어진 주인공들이 눈을 마주 보며 “네 인생이 보인다. 불쌍하다. 혼자가 아니기만을 바랐을 뿐인데”라고 말하는 장면이 클라이맥스다.

분노의 바닥을 들춰보면 약한 것이 보일 때가 있다. 한국교정복지학회 논문에 따르면 분노 범죄는 ‘선진국형 범죄’라고 한다. 사회는 발전했는데 나만 뒤처지고 고립됐다고 느끼는 박탈감이 주원인이다. 그래서 영국은 2018년 ‘외로움부’를, 일본은 2021년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신설해 이런 분노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정부 차원에서 다룬다. 정치의 역할이 속 시원히 욕먹는 것 이상이어야 할 이유기도 하다.

불과 며칠 전 “정치인의 막말이 정치혐오로 번졌다”며 테러에 고개를 숙였던 한국 정치권에선 슬그머니 다시 분노의 설전이 펼쳐지고 있다. 테러의 배후가 밝혀진들 테러가, 분노가 사라질까. 오늘도 댓글 창을 조심스레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