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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이재명 독재 닮은 한동훈 칙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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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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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의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수락 연설에서 명시적 공천 기준 관련 발언은 딱 한 구절이다. “우리 당은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기로 약속하시는 분들만 공천할 것이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중에 약속을 어기는 분들은 즉시 출당 등 강력히 조치하겠습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의 집단적 불체포특권 포기는 이미 지난해 중반에 선언됐다. 김기현 당시 대표가 추진했다. 111명 의원 중 109명이 동의하고 서약서를 냈다. 나머지 두 명이 권은희·김웅 의원이다. 두 의원은 국회의원 체포 제한은 헌법에 있는 것이고, 개별 의원이 포기하고 말고 할 권한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을 밝혔다. 두 의원은 당 대표가 제시한 방향을 따르지 않았지만, 당이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한 “불체포특권 포기해야 공천”
토론·협의 없이 취임사로 선언
비민주적 정당 운영 답습 곤란

그런데 한 위원장이 불체포특권 포기 약속을 공천 필수 조건으로 제시했으므로 권·김 의원은 소신을 접지 않는 한 4·10 총선 공천을 받을 수 없다. 한 위원장의 취임 일성이 울려퍼진 지난달 26일 두 의원은 공천과 신념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양자택일 상황을 맞았다.

김웅 의원은 8일 불출마 선언을 했다. 둘 중에서 후자를 택한 것이다. 그는 “체포동의안 포기 선언에 동참할 수 없다. 그것은 법률가로서의 원칙과 보수주의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헌법상 제도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데 동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고작 이재명 대표 잡겠다고 헌법상의 제도를 우습게 여기는 것에 결단코 반대한다”고도 했다.

김 의원 불출마 결심이 오로지 이 사안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 공천과 재선 가능성을 고려한 결과일 수 있다. 그는 한동훈 장관 비대위원장 영입설이 돌던 지난달 중순 의원총회에서 “국민이 윤석열 대통령의 ‘아바타’라고 생각하는 한 장관을 올리면 총선에서 이기겠는가”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지지층 일각에서는 김 의원을 ‘해당분자’로 본다.

김 의원의 내심이 무엇이냐를 떠나 “지금의 국민의힘이 민주적 정당인지를 묻는다”는 문제 제기는 정당하다. 한 위원장은 국민의힘 입당 서류 제출 4일 뒤에 비대위원장이 됐다. 불체포특권 포기를 공천의 핵심 기준으로 삼는 것은 여당 내에서 논의된 적이 없다. 몇 사람이 모여 이야기했을 수는 있겠지만, 공적 절차에 따른 협의는 없었다. 신임 비대위원장의 깜짝 선언이었다.

한 위원장은 지난달 26일의 취임사에서 “대한민국 헌법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국민의힘은 바로 그 자유민주주의 정당입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고…”라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되도록 많이 모일 때 비로소 강해지고, 유능해지고…”라고도 했다. 자유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 다양성의 효용을 말했다. 그런데 불체포특권 포기에 대한 의견 수렴이나 토론이 없었다. ‘약속하시는 분만 공천’은 파견 사령관의 칙령 반포 같은 것이었다.

‘국회의원은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기 중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한다’는 헌법 조항(44조)은 건국 헌법부터 존재했다. 의원 체포 제한은 절대권력자의 무단 정치를 제어하기 위해 영국에서 고안됐으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분류되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시행된다.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가 국회 회기를 늘리는 꼼수를 동원하며 오·남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없앨 수 없는 제도다. 방탄용 임시회 개최를 막는 방안 등 정비 대책이 있다. 이미 관련 국회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한 위원장의 뜻은 알 것 같다. 그래도 각자가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그가 말한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난다. 여당이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민주당 1인 체제’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법은 민주적 정당 운영이다. 오래전에 니체가 싸우다가 상대를 닮는 비극을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