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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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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대기자

이하경 대기자

힘센 사람이 권력에 취하면 판단이 흐려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부인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60%가 넘는 반대 여론과 충돌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총선용 여론 조작 법안”이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민의 불쾌한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가족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 전례는 없었다. “위헌적 권한 행사”라는 야당의 서늘한 주장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차남 김현철 때문에 몰락했다. 대선 일등공신 김현철은 안기부와 청와대에 심복을 두고 막강한 정보력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소통령’의 전횡을 YS에게 직보(直報)한 박관용 비서실장은 반격을 당해 바로 힘을 잃었다. 김현철의 특급 참모는 김기섭 안기부 운영차장이었다.

윤 대통령, 배우자 문제로 시험대
정치 9단 양김도 아들 관리 실패
특별감찰관이 모든 의혹 조사를
대통령·배우자 일정도 공개해야

1997년 김기섭 파문으로 시끄러울 때 노신영 전 총리를 만나 소회를 들었다. “안기부에서는 매일 수천 건의 정보와 첩보가 생산된다. 그중 5건만 부장에게 올라온다. 2년8개월 동안 부장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보고했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내용이다. 김기섭은 권한 없는 대통령 아들에게 매일 보고했다. 명백한 국정농단이다.”

김현철은 한보게이트의 몸통으로 지목돼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여권과 검찰 수뇌부는 서울대 교수들이 4·19 혁명 때처럼 시위에 나설 거라는 보고를 받고 당황했다. 검찰은 서둘러 별건수사에 나섰고, 조세포탈이라는 금시초문의 죄명을 적용했다.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편법이었다.

김현철은 검찰 재소환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이틀 조사받고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YS는 “미안하다. 내가 힘이 없다”고 했다. 김현철은 이틀 뒤인 1997년 5월17일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는 최초로 구속됐다. YS를 만나고 나온 신상우 전 해수부 장관은 “대통령이 넋이 나갔다”고 했다.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없었고, 결국은 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장남 김홍일은 정치적 동지였다. 김홍일은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얻었고,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DJ 집권 이후 단숨에 권력 실세가 됐다. 박주선 법무비서관은 초대 내각 각료 명단을 발표하기 위해 걸어가는 도중 DJ의 전화를 받았다. “나 때문에 고문당해 불구가 된 아들의 부탁이오….” 장관 한 사람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조승형 헌법재판관의 국정원장 기용이 은밀히 검토됐을 때 밤늦게 김홍일의 동교동 자택 문을 두드린 적이 있다. 자다가 일어난 그는 “없던 일이 됐다”고 화끈하게 확인해 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견제를 많이 받아서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지만 돌아가는 건 다 안다.” 다른 취재로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인사 청탁을 하는 방문객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인기 트로트 가수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 아들의 영향력은 전방위적이었다.

당시 대통령 친인척과 가족을 관리하는 민원비서관은 김홍일의 30년 친구였다. 허술한 감시는 비극을 불렀다. 김홍일은 권력형 뇌물비리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DJ의 다른 두 아들은 재임 중 구속됐다. 분노한 민심 앞에서는 검찰도 이들에게 총구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민심을 잘 읽었던 ‘정치 9단’ YS·DJ도 이렇게 자식 관리에 실패했고, 임기 말에 눈물 흘렸다. 윤 대통령은 임기를 2년도 채우기 전에 고난의 시험대에 올랐다. 가혹한 운명이지만 어찌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조기에 민심을 수용하면 남은 기간의 국정 운영은 순항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당당하게 특검을 받겠다고 나왔어야 했다. 공정과 상식을 내걸고 당선된 승부사 대통령의 모범답안이었다. 이제라도 민심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제2부속실을 설치해 배우자를 관리하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선 공약대로 특별감찰관을 임명하고 해외순방 중 김건희 여사 명품 쇼핑, 명품백 수수, 인사청탁,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등 배우자 관련 의혹을 빠짐없이,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문제가 드러나면 일벌백계하고 대국민 사과와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내친김에 대통령과 배우자가 언제 누구를 만났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무성했던 루머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대통령이 민심에 맞서거나 마지못해 따라가는 시늉만 하면 안 된다. 하늘의 그물은 커서 성긴 듯하지만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노자 도덕경). 선행도, 악행도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마음을 내려놓고 하늘 같은 국민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YS·DJ조차 피할 수 없었던 비극적 운명을 반복하지 않는 길이다. 끝까지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