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왕건 앞세워 이룬 중앙-지방 권력 교체의 대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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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방 사람들의 고려 건국

이익주 역사학자

이익주 역사학자

한국 역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왕조의 수명이 길고, 왕조교체가 매우 드물다. 고구려·백제 600년 이상, 신라 1000년, 고려·조선 500년이다. 왕조교체는 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된 것밖에 없다. 이것을 가지고 역사 발전이 더뎠다는 정체론(停滯論)의 근거로 삼기도 하고, 전복 세력의 등장을 허락하지 않은 선정(善政)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한국 역사에서 왕조교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때마다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이 민심이었다. 신라에서 고려로 교체될 때도 민심이 요동쳤다.

신라 말 재정 시스템 붕괴가 반란 촉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청동상. 북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 안에 있는 왕건의 무덤 현릉에서 출토됐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청동상. 북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 안에 있는 왕건의 무덤 현릉에서 출토됐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신라 말이던 서기 889년, 『삼국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나라 안의 모든 주군(州郡)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국고가 텅 비고 재정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자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지금의 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의 왕은 신라의 세 여왕 중 한 사람인 진성여왕이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사람은 여왕의 실정을 부각하려 했지만, 이게 어디 국왕 한 사람의 잘못을 탓할 일이었겠나. 또 국가의 세금 독촉에 저항한 사람이 어디 몇몇 도적뿐이었겠는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쓰는 국가 시스템이 무너진 결과이고, 그 때문에 전국에서 헐벗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원종과 애노를 시작으로 북원(지금의 원주)에서 양길과 궁예, 죽주(지금의 안성)에서 기훤, 전주에서 견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신라 조정은 이들을 진압할 능력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자 ‘도적’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된 지방민들이 촌주(村主) 같은 유력자를 중심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도 있었다. 견훤은 본래 신라의 군인이었는데, 도적을 토벌하러 파견되었다가 오히려 그들을 규합해서 우두머리가 되었다. 출발은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독립된 세력을 이루었고, 신라의 통치에 반발하는 민심을 바탕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이런 사람들을 지금 우리는 호족(豪族)이라고 부른다.

호족의 지지를 받아 후삼국 통일

경북 안동의 태사묘. 이 지역 호족으로 왕건에게 협력한 김선평·권행·장정필 삼태사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경북 안동의 태사묘. 이 지역 호족으로 왕건에게 협력한 김선평·권행·장정필 삼태사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호족들은 서로 싸우기도 하고 연합하기도 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궁예가 양길과 싸워 이긴 것이 전자의 예라면, 송악(지금의 개성)의 호족이던 용건(왕건의 아버지)이 스스로 궁예 밑으로 들어간 것은 후자의 예이다. 이렇게 해서 지방의 독립 세력이 하나, 둘 통합되었으며, 최종적으로 견훤과 궁예가 각각 후백제, 후고려를 건국하고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 시대를 열었다. 그 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뒤 후삼국 통일을 달성했다(936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는 호족들의 지지가 결정적이었다. 왕건은 즉위한 지 두 달 만에 각지의 호족들에게 ‘중폐비사(重幣卑辭)’의 뜻을 전했다. 선물을 넉넉하게 주고(중폐) 겸손한 말을 쓰겠다(비사)는 뜻이니, 자기 아래로 들어오면 후하게 대접하고 우대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이 말을 듣고 왕건 밑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심지어는 왕건과 패권을 다투던 견훤의 아버지, 상주 호족 아자개조차 왕건에게 귀부해왔다. 또, 유명한 얘기지만, 왕건은 부인이 스물아홉 명이나 되었다. 그 많은 정략결혼을 통해 지방 호족의 지지를 끌어냈던 것이다.

지방 호족들의 협력은 왕건에게 큰 힘이 되었다. 930년에 고창군(지금의 안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고창군에서는 견훤과 왕건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였다. 처음에는 왕건이 불리했으나 그 지방 호족 세 사람의 도움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여기서 승리하면서 왕건은 전체 판세를 뒤집고 6년 뒤에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고창군(郡)은 안동부(府)로 승격했고, 세 사람의 호족은 왕건으로부터 김씨, 권씨, 장씨 성을 하사받아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라는 성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각각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신라 기득권 극복이 근본 과제

경기도 광주 하사창동에서 출토된 철조 불상. 광주 지역의 호족이며, 왕건의 장인인 왕규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광주 하사창동에서 출토된 철조 불상. 광주 지역의 호족이며, 왕건의 장인인 왕규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왕건은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가며 후백제의 견훤과 싸웠지만, 정작 더 중요한 상대는 신라였다. 비록 군사력은 와해되고 실제 통치 범위도 경상도 지역에 한정되었지만, 신라에는 1000년 왕조의 전통과 권위가 있었다. 경주가 서울이던 시절, 벽지이던 송악 출신의 왕건이 과연 통일 왕조의 임금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새 나라를 만들고 송악으로 서울을 옮기는 것을 사람들이 용납할 수 있었을까?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동원된 논리가 마침 그때 당나라에서 들어온 풍수(風水)였다.

신라 말 재정 파탄 민심 요동쳐
지방 독립세력이 호족으로 성장

“복종하면 후히 대접” 지지 유인
풍수가 고려에 새로운 권위 부여

왕건은 건국, 호족은 이익 실현
서울과 지방이 공존했던 나라

풍수란 땅에 보이지 않는 기운, 즉 지기(地氣)가 있어서 성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한다는 믿음이다. 이에 따르면 경주가 영원히 변치 않는 서울일 수 없었다. 경주의 기운도 시간이 지나면 쇠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송악도 때가 되면 서울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풍수는 경주의 전통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고려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 시대 묏자리 잡는 음택(陰宅) 풍수로 쪼그라들기 전, 우리 역사에서 풍수가 가장 멋진 역할을 한 순간이었다.

왕건을 비롯해서 신라 말에 등장한 지방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투쟁했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극복해야 했던 것은 신라의 전통이었다. 고려 이전, 통일신라까지는 왕경인(王京人), 즉 서울 사람들의 독무대였다. 신라 골품제 아래서는 진골과 6두품, 5두품, 4두품 사이에 엄격한 신분 차별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방 사람들이 보기에는 맨 아래 두품조차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신분이었다. 골품제는 서울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신분제였고, 지방 사람들은 모두 ‘골품 외’였다. 이렇게 된 것은 신라 국가가 처음 만들어질 때 경주 일대의 사로국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로국의 후손들은 1000년 가까이 건국 세력의 기득권을 누렸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대는 왕경인이 통치한 사회’(전덕재, ‘한국고대사회의 왕경인과 지방민’)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 말의 사회 변동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권력이 교체된 대사건이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고려, 조선과 큰 차이

『고려사』에 인용되어 있는 『편년통록』. 왕건의 조상에 대한 기록으로, 풍수를 이용해서 왕건의 출현을 예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사』에 인용되어 있는 『편년통록』. 왕건의 조상에 대한 기록으로, 풍수를 이용해서 왕건의 출현을 예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왕건이 지방 호족의 협력에 힘입어 후삼국을 통일했다면, 호족의 입장에서는 왕건을 통해 이익을 실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 사람은 관직에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태, 즉 1000년의 소외에서 벗어나 새 나라 고려의 지배층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고려 왕조에서 지방 호족들은 중앙의 관리가 되거나 지방의 향리가 되는 길을 선택했고, 향리로 남더라도 본거지에서 영향력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중앙의 관리가 되는 길이 열려 있었다. 이 점에서 광종 때 시작된 과거제도의 의미가 재해석 되어야 한다. 실제로 고려 내내 지방 향리들은 과거를 통해 끊임없이 서울로 올라갔고, 지배 세력을 정화하는 새로운 피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고려는 지방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든 나라다. 따라서 서울과 지방의 관계도 새롭게 설정되었다. 개경이 서울로서 우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독점은 더 이상 용인되지 않았다. 서울과 지방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이 모색되었고, 고려 특유의 본관제(本貫制)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공존을 통해 고려는 500년을 버텼다. 서울 사람이 모든 것을 독차지했던 신라가 그것 때문에 멸망한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고려는, 우리 역사 속에서 신라와 조선 사이에 500년 가까이 존속한 나라, 남녀 차별이 덜 심했고, 남녀 간의 사랑은 자유로우며, 대외적으로 개방적이고, 거란과 싸워 이긴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가장 잘 모르는 나라가 아닐까.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을 몇백 년 앞으로 끌어다 놓으면 그것이 곧 고려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불교 국가 고려와 유교 국가 조선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조선과 다른 500년의 역사가 있었다.

◆이익주=역사학자이며 서울시립대 교수다. 고려 역사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주로 연구하고, 학계의 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일도 열심히 한다. 『이색의 삶과 생각』(2013)을 썼고, 유튜브 ‘이익주는 역사’ 강의를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