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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명림의 퍼스펙티브

진영논리와 포퓰리즘 앞에서 무너져버린 공적 권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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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권위의 소멸 시대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한국의 오늘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시대 언어는 소멸이다. 특별히 지방소멸, 인구소멸, 학교소멸은 한국사회의 3대 소멸이라고 부를 만큼 심각하다. 이제 ‘위기’나 ‘감소’와 같은 평범한 언어로는 - 사실은 이들 언어조차 결코 평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이 시대 전체를 드러내기에는 너무 온건할 정도로 오늘의 상황은 위중하다.

소멸의 속도와 규모는 끔찍할 정도다. 이대로 가면 이 공동체가 소멸로 치달을 것이라는 객관적 지표와 예견은 국내외로부터 제출된 지 오래다. 아니다. 그러한 객관적 진단과 추론들을 계속 뛰어넘을 만큼,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 3대 소멸 지표의 속도와 규모는 더 빠르고 더 압축적이다.

사회 각 부문 독자성·자율성 존중하는 데에서 공적 권위 시작
한국은 정치·국가 과도한 우위…권력은 커졌으나 권위는 축소
이익 배분에서 사적 관계 작용하는 ‘무도덕적 가족주의’ 판쳐
파당 논리 벗어나 대화와 권위 회복해야 공동체도 소생 가능

우리는 여기에 하나의 소멸을 더 추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권위의 소멸이다. 한국 사회에서 거의 모든 부문과 영역에 걸쳐, 이익과 권력이 매개되지 않는 한, 아니 외려 그것 때문에, 공적 권위 구조와 체계는 붕괴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올해 대표적인 사건은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자살이었다. 사사(私事)와 사익(私益)의 과도한 공공영역 침투와 파괴를 말한다. 가정의 사적 관계와 자녀 사랑이 공적 교육영역으로 넘어와 어떠한 영역과 역할 구분도, 따라서 권위도 권한도 존중하지 않는 상태가, 숨 막히는 상황에 몰린 교사의 자살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공적 권위 붕괴와 초교 교사의 비극

박명림 퍼스펙티브

박명림 퍼스펙티브

정치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상대 진영의 가치와 권위는 존경과 존중은커녕 인정과 수용도 안 한다. 권위는 애초에 권한·저작권과 같은 뜻이다. 즉 각기 사회 영역과 부문들의 고유한 존재 이유와 직분, 역할과 기능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말한다. 한 사회가 공적으로 건강하게 발전하는 지름길이다. 사적 신분적 권위가 아닌, 자율적이고 공적인 권위의 구축은 인류에게 근대를 가능하게 한 요체의 하나였다. 입법권·행정권·사법권의 분리도 물론이다. 권위·권한 개념의 등장과 함께 국민주권, 민주공화국, 권력분립, 대의민주주의가 함께 발전하였음은 익히 아는 바대로다.

공적 권위는 사회 각 영역의 분획과 분별을 통한 독자성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발원한다. 그러나 한국은 정치와 국가 영역의 과도한 우위와 독주가 일반이다. 각 고유 영역의 본질적 자율성을 침해하면 자유와 권리는 물론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도 위협받는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권위도 점점 실종되고 추락한다. 워싱턴과 링컨과 루스벨트는 지금보다 훨씬 더 권력은 적었으나 권위는 절정이었다. 지금은 당시보다 권력은 비교할 수 없이 커졌으나 권위는 형편없다.

공적 권위의 상실을 대체하는 한국사회의 중심 원리는 무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오늘을 압축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핵심적인 공적 가치들의 판단과 적용의 준거는 마치 가족과 같은 사적 관계와 윤리들이다. 공적 조직 역시 사적 가족처럼 보호하거나 배제한다. 무도덕적 가족주의에서는, 자리이건 물질이건, 이익들이 공적인 권위적 배분보다 단기적인 직접적 보상에 의해 제공된다. 거기에서 엄정한 공적 기준과 공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국가의 거시적인 탈진영적 공적 의제들이 더욱 악화하는 이유다. 진영 이익이라는 사익의 공공화를 말한다.

진영으로 갈라진 한국사회에서 - 적어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 정부와 대통령, 국회와 정당, 법원과 검찰은 더 이상 전체 국민의 통합과 수렴의 기제이자 제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지난 촛불시위 당시 한국사회는 6월항쟁 이후 최고의 국민통합 기회를 맞았다. 시민들과 의회와 법원의 일치된 견해는 한 사회의 일정한 의견 통합을 함의한다. 그러나 촛불 이후의 상황은 우리를 크게 당혹하게 만들었다. 국민통합 대신 적폐청산과 함께 나라는 정의와 불의, 합법과 불법, 청산과 법치의 이분법 사회로 치달았다.

국민통합 기회 날린 촛불 이후 상황

오늘의 민주주의 연구들에 따르면 진영 대결의 정치는 이른바 ‘민주적 교착상태’를 넘어 ‘민주적 난기류’와 ‘민주적 수렁’으로 빠져들어 민주주의 자체를 형해화하고 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현대 국가의 ‘역할’과 ‘과제’는 폭증하는 데 비해, 나라가 두 진영으로 쪼개져서 ‘권위’와 ‘승복’은 사라지고 있는 현상을 말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빈발하던 민주적 교착상태는 입법부와 행정부, 또는 대통령과 의회 사이의 제도적 권력적 길항과 충돌을 말한다.

그러나 민주적 난기류와 민주적 수렁 상태는 제도를 넘어 사사건건 진영대결이 반복되는 상황을 말한다. 게다가 그것은 자주 제도와 절차를 넘어 진영으로 갈라진 국민과 시민사회까지 함께 얽혀서 온통 편을 갈라 드잡이하곤 한다. 진영대결이 포퓰리즘과 한 짝인 이유다. 그러니 지지층 절반의 열광적인 지지의 반대편에는 국민 절반으로부터 권위의 인정과 존중은커녕 극단적인 저주와 혐오를 받기 일쑤다. 오늘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거리와 인터넷 공간의 구호와 언어들처럼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다.

부족장 숭배 방불케 하는 팬덤 현상

따라서 권위의 실종은 포퓰리즘의 한 유의어인 팬덤 현상과 직결된다. 참여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정치를 휩쓸고 있는 포퓰리즘과 팬덤 현상의 부정적 효과는 강조할 필요도 없다. 본래 팬·열광은 공개된 정통 종교시설이 아니라 은밀한 이단·신전·무속시설에서 파생되었다. 광적·광기라는 말의 연원이기도 하다. 근대화·문명화·시민화는 이러한 사적인 미신과 주술을 타파하는 과정이었다.

팬덤 현상은 종교·문학·음악·미술·연예·스포츠, 즉 사적 영역에서의 취미나 애호로 충분하며, 본시 그러한 영역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공적 영역과 준거로 들어올 때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인류의 최고 철학자는 이러한 영역 전이가 지니는 위험성을 깊이 통찰한 바 있다. 공적 여과와 발현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사적 기호나 선호가 공공 영역으로 넘어올 때는, 마치 광기와 주술이 그러하듯, 소통과 설득이 불가능하며 항상 평행이며 요지부동이다. 절대 양보나 타협을 모른다.

더욱 문제는 이러한 직접성이 중우성(衆愚性)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지금 한 진영과 파당과 파벌의 수장과 리더에 대한 지지와 혐오는 마치 사적 부족장에 대한 충성과 배척처럼 집요하고 극렬하다. 종파의 교주와 신전을 옹위하듯 비판과 지적에 대해 벌떼처럼 격렬하게 반응한다. 진영 내부에서조차 파당적 공격의 언어들은 강렬하고 모욕적이며 지극히 비도덕적, 반인간적이다.

집단 내부에서마저 사라진 대화

그렇다 보니 진영과 진영 사이의 대화 단절과 사생결단식의 능멸과 모욕은 진영 내부에서도 동일하다. 대화는 진영과 진영, 여와 야 사이에만 단절된 것이 아니다. 여당 내부, 야당 내부에서도 대화가 거의 없다. 집권세력 내부의 권력 핵심 대 권력 주변 사이의 대화는 거의 없다. 같은 당 내부일지라도 일반 의원들과 지도부 사이의 대화도 거의 없다. 현실이다. 여야 대화 부재? 그렇다면 각각 여당 내, 야당 내에서는 이견 세력들 사이에 대화가 존재하는가? 그냥 윽박지름과 일방통행이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대화주의를 말한다. 같은 당내의 계파가 다른 의원들 사이, 또 지도부와 평의원들, 즉 헌법기관인 의원 자신들끼리도 긴밀히 대화하지 않으면서 국민과는 소통하겠단다. 이런 대화는 위선이며 민주주의의 원리에 반한다. 자기들의 파당적 논리에 따라 국민과 지지자들을 위로부터 동원하려는 우민(愚民) 관점과 논리의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모든 공적 권위를 해체하고 부정하는 진영 논리와 진영 대결, 포퓰리즘과 팬덤 정치는 이제 종식되어야 한다. 근대화·문명화·시민화가 탈(脫)주술화·탈(脫)광기화 과정과 직결되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어떤 공적인 민주적 절차와 과정도 진영 대결과 포퓰리즘이 결합해서는 안 된다. 둘 다 민주주의에 위배되며, 둘의 결합은 더욱 최악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지금 민주적 대화를 통해 진영 대결과 포퓰리즘을 넘어 함께 사회 각 영역들의 공적 권위를 회복할 때이다. 그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소멸’이라는 불행한 시대 흐름은 끝내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