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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살리고 떠난 아빠…완강기도 없는 아파트, 불 나면 어떻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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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나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위로 가도 죽고, 떨어져도 죽고….” 25일 성탄절 가족을 대피시키던 30대 남성 2명이 숨지고 30명이 다친 서울 방학동 화재 다음 날인 26일 이 아파트 주민은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는 다른 동 17층에 거주한다. 인근 아파트 7층 주민 김모(56)씨도 “화재가 나면 옥상으로 가라고 배웠는데, 무엇이 적절한 탈출법인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성탄절인 25일 오전 4시57분쯤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2명이 숨지고 30명이 다쳤다. 불은 아파트 3층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찬규 기자

성탄절인 25일 오전 4시57분쯤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2명이 숨지고 30명이 다쳤다. 불은 아파트 3층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찬규 기자

방학동 화재는 3층에서 발생했지만, 계단이 굴뚝 역할을 하며 피해가 커졌다. 저층엔 스프링클러도 없었다. 이에 최초 119 신고자인 임모(38)씨는 10층 집에서 잠 자던 부모와 동생을 깨워 먼저 대피시킨 뒤 뒤늦게 피신하다가 11층에서 계단에서 연기 흡입에 의한 화재사로 숨졌다. 고층 건물 화재시 줄을 타고 천천히 내려올 수 있는 완강기도 설치 안 돼 있었다. 화재 발생 위층에 살던 박모(32)씨는 치솟는 불길에 베란다에서 생후 7개월된 아이를 이불에 싸고 뛰어내리다가 숨졌다.

고층 아파트 화재 안전 설비 미비가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셈이다. 특히 2001년 완공된 방학동 아파트처럼 안전관리 법령이 없을 때여서 안전설비를 갖추지 못한 아파트들이 취약한 사각지대에 있다.

마포에 위치한 36층 아파트에는 비상 대피용 테라스가 설치되어 있다. 반면 2008년 준공된 39층 아파트에는 비상 대피용 테라스도 피난층도 없었다. 박종서 기자

마포에 위치한 36층 아파트에는 비상 대피용 테라스가 설치되어 있다. 반면 2008년 준공된 39층 아파트에는 비상 대피용 테라스도 피난층도 없었다. 박종서 기자

현행 건축법은 50층 이상인 ‘초고층’ 건축물과 30층~49층인 ‘준초고층’ 건축물 경우 지상으로 가는 직통계단이 설치된 ‘피난층’이나 단열·불연재료로 지은 ‘피난안전구역’을 매 30층마다 1개소 이상(준초고층은 전체 층수의 중간에)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초고층 건축물은 2009년, 준초고층 건축물은 2011년부터 피난층 설치 의무 규정이 생겼다. 2008년 준공된 39층 아파트에서 거주하는 박모(26)씨는 “33층에서 살고 있지만, 아파트에 피난층이 없다”며 “고층에서 고립되면 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2001년 완공된 방화동 아파트는 16층부터 스프링클러가 설치된 것으로 파악됐다. 11층 이상의 공동주택 전층에 스프링클러 설치와 방화문을 의무화한 것은 2004년 5월부터다. 각층에서 계단가 연결된 방화문은 있었지만, 화재 당시 문이 열려있어 제 역할을 못 했다.

닫혀있어야 하지만 열려있는 방화문. 중앙포토

닫혀있어야 하지만 열려있는 방화문. 중앙포토

인천 계양에 거주하는 박모(55)씨는 “2002년에 완공된 아파트 13층에 살고 있는데, 스프링클러가 없다는 사실을 최근 알았다”며 “혹시 모를 상황에 개인적으로 설치해야 하나 싶다”고 말했다.

노후 고층 아파트의 경우 스프링쿨러와 완강기 등 필수 안전설비부터 마련하는 게 급선무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아크(스파크) 차단기를 설치하면 전기 불꽃으로 인한 화재를 줄일 수 있다”며 “배선용 전기 차단기와 누전 차단기의 정기 점검도 중요하다”고 했다.

현 위치서 가장 가까운 1층-옥상으로 대피…“완강기 사용법 익혀야”

전문가들이 조언하는 고층 건물 화재시 대피의 제1 원칙은 ‘1층(지상)’ ‘옥상’ ‘피난안전구역’ 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대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영주 경일대 소방방재학부 교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1층으로 몰릴 가능성도 있어 안내방송에 따라 화재 발생층과 위층 가구가 먼저 대피하고, 순차적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했다.

10층 이하에선 계단 이용이 불가능한 경우 완강기를 이용한 대피도 가능하다. 문제는 아파트 주민 대부분이 입주 시 ‘완강기 사용법’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완강기 사용법. 행정안전부

완강기 사용법. 행정안전부

완강기는 지지대, 후크, 속도조절기, 로프 릴, 가슴벨트 등 5가지로 구성된다. ① 속도조절기와 결합된 후크를 지지대 고리에 걸고 나사를 고정하고 ② 가슴벨트를 겨드랑이 밑에 걸고 고정 링을 조절해 벨트가 확실히 조여진 걸 확인한 후 ③ 양손으로 조절기 밑 로프 2개를 잡고 건물 벽면을 지지하면서 천천히 내려가면 된다. 다만 소방 관계자는 “11층 이상은 하중 문제로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만약 화재 연기와 가스 때문에 계단 이용이 불가능하고, 완강기를 쓸 수 없는 상황인 고층 주민은 무작정 대피하는 건 더 위험할 수 있다. 공 교수는 “옷가지 등을 물에 묻혀 현관 등 연기가 들어오는 문틈을 모두 막고, 화장실 욕조에 물을 채운 뒤 대피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성탄절 방학동 화재 원인은 담배?…감식단 “인적 요인 발화 배제 못해”

26일 오전 11시 과학범죄수사대, 소방 화재조사단, 한국전기안전공사 등 21명의 인력이 투입돼 전날 새벽 서울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의 원인을 조사했다. 이찬규 기자

26일 오전 11시 과학범죄수사대, 소방 화재조사단, 한국전기안전공사 등 21명의 인력이 투입돼 전날 새벽 서울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의 원인을 조사했다. 이찬규 기자

경찰‧소방‧한국전기안전공사 등 21명으로 꾸려진 합동감식단은 26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30분쯤까지 성탄절 방학동 아파트 화재 현장 감식을 진행했다. 감식단은 “전기적 요인에 의한 발화 가능성은 배제했다”며 “인적 요인에 의한 발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전기기구의 오작동이나 누전 등으로 화재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요소에 의해 화재가 발생했다는 설명이다.

경찰에 따르면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담배꽁초, 라이터와 화재의 연관성을 수사 중이다. 다만 감식단은 “방화 가능성은 크지 않다”며 “실수나 부주의로 의한 발화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26일 오전 11시 과학범죄수사대, 소방 화재조사단, 한국전기안전공사 등 21명의 인력이 투입돼 전날 새벽 서울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의 원인을 조사했다. 이찬규 기자

26일 오전 11시 과학범죄수사대, 소방 화재조사단, 한국전기안전공사 등 21명의 인력이 투입돼 전날 새벽 서울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의 원인을 조사했다. 이찬규 기자

경찰에 따르면 3층에 거주하는 70대 노부부가 “화재 초기 진압을 시도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파악됐다. 발화지점은 거실 쪽 작은방인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감식을 통해 발견한 증거물을 분석하고, 70대 노부부를 추가로 불러 정확한 화재 원인을 규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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