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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현목의 시선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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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현목 기자 중앙일보 문화부장
정현목 문화부장

정현목 문화부장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드넓은 대지에 다시 새길 희망을 안고 달려갈 거야. 너에게.”

JTBC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3’의 명장면 중 하나다. 1라운드에서 17년 전 애니메이션 주제가 ‘질풍가도’가 원곡자 유정석씨의 녹슬지 않는 성량으로 울려 퍼지자 많은 이들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야구도 인생도 실패가 성공 발판
한국영화 침체, 도전의식 실종 탓
실패 재평가, 전 사회에 확산돼야

그는 녹록치 않은 환경 때문에 오래전 가수의 길을 접어야 했지만, 오랜 공백을 딛고 다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처럼 힘들어하는 많은 이들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안겨줬다. 건강상 이유로 그는 도전을 멈췄지만, 단 한 번의 무대로 최종 우승 못지않은 울림을 줬다. 늘 주변에 머물며, ‘성공’ 보다 ‘실패’에 근접한 가수들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부여하는 프로그램 취지에 가장 걸맞은 무대였다.

이 노래는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LG 트윈스가 29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순간에도 울려 퍼졌다. 늘 정상 근처에서 고배를 마셨던 LG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진 건 ‘실패’를 독려한 염경엽 감독의 리더십 때문이었다. 뛰어난 선수도, 우승 감독도 아니었던 그는 LG 감독 첫 시즌, 선수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플레이하라”고 주문했다. 선수 대기실 앞에 ‘두려움과 망설임은 나의 최고의 적’이라는 문구도 붙였다.

‘도련님 야구’란 비아냥에 시달렸던 팀답지 않게 선수들은 뛰고 또 뛰고, 몸을 날렸다. 가장 많은 도루 실패를 했지만, 허슬 플레이를 통해 공격적인 팀 컬러를 만들었고, 우승까지 일궈냈다.

김성근 감독은 실패를 거름 삼아 ‘야신’으로 성장했다. 2007년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 감독이었던 그는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 2차 전을 내리 지고 벼랑 끝에 몰렸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두 번의 패배를 복기한 뒤 3차전부터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네 번을 내리 이기며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그는 프로 진출에 ‘실패’한 선수들로 구성된 독립구단 고양원더스를 이끌 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선수들을 조련했다. “못해도 된단 말이야. 이렇게 못하나 저렇게 못 하나 똑같은데 한 번 해보려고 하라고. 무리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선수들은 계속 도전했고, 조용호·황목치승 등이 프로에 입단하며 패자 부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누구든 실패를 겪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 그게 야구고, 인생이다. 강타자가 3할을 친다는 건, 10번의 타석(기회)에서 3번 안타(성공)를 치고, 나머지 7번은 아웃(실패)된다는 뜻이다. 7번의 실패에서 배우고 가다듬어야 3할의 타율을 이어갈 수 있다. 그래서 야구를 ‘3할의 예술’이라고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유명 감독 중에서 흑역사로 기억되는 작품 한두 편 안 가진 이가 없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지옥’ ‘D.P.’ 시리즈를 제작한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변승민 대표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실패를 맛본 감독들이 성공할 확률이 더 높고, 절벽에 섰을 때 성공할 힘도 강해진다.”

한국영화가 침체에 빠진 것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전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멀티캐스팅, 무난한 스토리, 적당히 섞은 웃음과 신파 등 ‘뻔하고 안일한’ 영화로는 더 이상 관객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 최근 배우 송강호는 “흥행에 실패할지언정 새롭고 과감한 시도들이 없다면 우리가 틀에 박힌 영화만 할 수밖에 없고, 볼 수밖에 없다”며 도전 의식이 실종된 한국영화계에 일침을 놓은 바 있다.

성과와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압축성장을 이뤄낸 우리 사회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혐오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치열한 생존 경쟁은 그런 분위기를 더욱 부추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일각에서 실패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카이스트(KAIST)가 ‘실패 주간’을 만들어 ‘망한 과제 자랑대회’ 등 학생들의 실패 경험을 공유하는 행사를 개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학교 ‘실패연구소’의 모토는 ‘성공은 도전에 의해서만 이룰 수 있고, 도전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공한 인생은 실패 없는 인생이 아니라, 실패를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이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투수 크리스티 매튜슨은 말했다. “승리하면 조금 배울 수 있고,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한 해를 뒤돌아보는 연말, 올해의 성취와 함께 실패 또한 돌아보는 게 어떨까. 왜 실패했는지, 거기서 무엇을 배웠는지 적은 ‘실패 노트’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