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작 ‘구의 증명’ 1998년작 ‘모순’…한국소설, 베스트셀러 역주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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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최진영의 『구의 증명』왼쪽)과 양귀자의 『모순』은 신작이 아니지만 올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특히 젊은 여성독자 유입이 판매량 증가를 견인했다.

최진영의 『구의 증명』왼쪽)과 양귀자의 『모순』은 신작이 아니지만 올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특히 젊은 여성독자 유입이 판매량 증가를 견인했다.

요즘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중에는 출간된 지 꽤 지난 책들이 있다. 양귀자의 『모순』(1998)과 최진영의 『구의 증명』(2015)이 대표적이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모순』은 종합 톱100에 19주째, 『구의 증명』은 14주째 이름을 올렸다. 교보문고 2023년 종합 베스트셀러에서 『구의 증명』은 9위, 『모순』은 24위다.

오래전에 나온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은 흔치 않다. 더구나 두 책은 광고 등 마케팅 없이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알라딘·예스24에 따르면 『모순』은 2014년, 『구의 증명』은 2021년부터 판매가 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소설의 약진과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흥행에 힘입은 결과다. 특히 독자층이 한국 소설의 기존 소비층인 40대 여성이 아니라, 10~30대 여성이다.

최진영

최진영

『모순』의 주인공은 25세 미혼 여성 안진진이다. 안진진의 엄마와 이모는 한날한시에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다. 그런데 엄마는 시장에서 잡다한 물건을 팔며 망나니 남편을 부양하는 신세지만, 이모는 고민이 없는 게 고민인 부잣집 사모님이다. 소설은 안진진과 그의 엄마, 이모 등 여성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망한다.

기혼 여성이 겪는 신변의 변화를 20대 여성의 눈높이에서 관찰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알라딘에 따르면, 올해 『모순』 구매 독자 67%가 2030 여성이다. 『모순』이 한때 통속 소설로 불렸을 만큼 읽기 쉽고, 남녀의 삼각관계와 운명이 뒤바뀐 쌍둥이 자매 등 친숙한 소재를 다뤘다는 점에서 독자의 진입 장벽을 낮췄다는 전문가 분석도 있다. 김효선 알라딘 한국문학 MD는 “베스트셀러가 되기 위해서는 평소 책을 읽지 않는 독자가 사야 한다”며 “『모순』은 20대 독자가 ‘한국 소설 한 번 읽어볼까’ 생각했을 때 선택하기 좋은 책”이라고 설명했다.

2014년부터 판매량이 늘기 시작한 『모순』은 2020년에 전년 대비 2배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하며 페미니즘 열풍이 불었던 시점이다.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와 여러 책 유튜버(북튜버)의 추천도 판매량 증가에 영향을 줬다. 『모순』은 시한책방, 편집자K, 해죽이북카페, 『구의 증명』은 오늘책방, 불 켜진 밤 등에서 추천했다.

특히 『구의 증명』은 유튜브 플레이리스트가 흥행의 기폭제가 됐다. 플레이리스트는 특정 컨셉트의 음악을 모아 놓은 재생목록이다. 소설을 테마로 한 플레이리스트는 주로 짧은 소설 속 구절과 함께 읽을 때 듣기 좋은 노래를 모아놨는데, 『구의 증명』 플레이리스트 중에는 300만 조회 수를 기록한 경우도 있다. 『구의 증명』 플레이리스트의 노래는 주로 어둡고 잔잔하다. 그도 그럴 것이 『구의 증명』은 가난한 연인의 사랑 이야기다.

양귀자

양귀자

『구의 증명』 독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10대 여성 독자 비율이다. 알라딘에 따르면, 20대 여성이 27%, 40대 여성이 17%로 1, 2위이고, 10대 여성도 10%나 된다. 『구의 증명』의 경우 10~20대 여성 비율(37%)이 판매 순위가 비슷한 다른 소설과 크게 차이 난다. 10~20대 여성 비율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20%,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18%, 권여선의 『각각의 계절』이 13%이며, 그 가운데 10대 비율은 0.3~1.4%에 불과하다. 구환회 교보문고 소설 MD는 “『구의 증명』은 젊은 독자들의 온라인 입소문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특이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플레이리스트는 북튜버의 책 추천 영상과 성격이 다르다. 책이나 작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고, 그저 음악만 나온다. 그러다 소설의 한 구절을 짧게 곁들이는 정도다. 플레이리스트의 경우 조회 수가 늘어도 수익은 플레이리스트 제작자가 아닌 음악 저작권자에게 돌아간다. 이런 특징이 오히려 바이럴 효과를 가져왔다는 분석도 있다. 평론가가 추천하는 책과는 다르게, 유저끼리 공유하는 감상평을 통해 2, 3차 바이럴 효과를 누리게 됐다는 것이다.

일본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도 플레이리스트 효과를 누린 경우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는 소설 속 대사를 제목으로 한 2021년 플레이리스트가 474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그 해 『인간 실격』은 출판사(민음사)가 해당 판본을 출간한 2004년 이래 최다 판매량(7만 부)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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