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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거대한 가속의 시대

중앙일보

입력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처음엔 저항했지만, 지금은 나도 익숙해졌다. 유튜브·OTT 영상의 1.2~1.5배속 시청 말이다. 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건 작품의 훼손이라 개탄했었지만, 이제는 볼거리가 차고도 넘치니 어쩔 수 없다. 콘텐트 소비도 시간과의 싸움, 시간의 가성비를 따지는 ‘시성비’가 중요해졌다. 2배속 시청뿐 아니라 건너뛰기를 하며 보거나, 유튜브 요약본 시청만으로도 ‘그 영화를 봤다’고 말하는 시대다. 그저 바빠서가 아니라 “소유 경제에서 경험 경제로 축이 이동하면서 볼 것, 할 것, 즐길 것이 너무 많아져 시간이 돈보다 중요한 자원이 되는 분초사회”(『트렌드 코리아 2024』)다.

 노래를 130~150% 정도 빠르게 돌리는 ‘스페드 업(sped up)’ 버전도 인기다. 틱톡,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등 1분 내외 쇼트폼 콘텐트에 평균 3분 정도의 음악을 맞추다, 빨리 돌린 버전이 각광받게 됐다. 지난주 발매 10년 만에 지상파 음악방송 2위에 오른 엑소의 ‘첫눈’은 SNS 스페드 업 챌린지로 역주행했다. 빠르게 재생한 원곡에 새롭게 창작한 안무를 따라 추는 ‘첫눈 챌린지’가 틱톡, 릴스에서 크게 유행했다. ‘중소돌의 기적’으로 불렸던 피프티피프티의 ‘큐피드’ 역시 원곡보다 틱톡에서 스페드 업 버전이 화제를 모으며 해외 팬들의 인기를 얻은 경우다.

배속 시청에 음악도 배속 재생
'시성비' 높이지만 중독은 심해져
MZ세대는 ‘가속노화’ 우려까지

 일본에서는 이에 더해 책을 10분 분량으로 요약하는 모바일 독서 앱까지 인기를 끌며 ‘시성비’에 준하는 ‘타이파(타임 퍼포먼스)’라는 말이 나왔다. 생활 속도 전반도 빨라지고 있다. 『도둑맞은 집중력』에 의하면 미국인들은 1950년대보다 훨씬 빠르게 말하고, 도시인들은 20년 전보다 10% 빨리 걷는다. 코넬대 심리학과 제임스 커팅 교수의 연구에서 1920년대 12초이던 영화 원샷의 길이는 2010년대에는 4초, 2020년대에는 2.8초로 줄었다. 지루함을 견디는 시간은 짧아지고 집중력도 떨어진다. 캐나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따르면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인 2000년 12초였던 집중력은 몇 년 만에 8초로 3분의 1이 떨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2배속으로 ‘시성비’를 높였다고 그만큼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남는 시간에 또 2배속 소비를 하며, 결과적으로 한시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다. 세탁기의 등장으로 빨래가 수월해지자 더 많은 옷을 사고, 자주 갈아입고, 종류별로 세탁하는 등 위생관념이 철저해져 세탁 일 자체는 줄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소외와 가속』).

 ‘가속의 시대’는 심지어 사람들의 나이도 빨리 먹게 한다. 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는 3040세대가 부모세대보다 노화가 빠르고 빨리 죽을 수도 있다는 ‘가속노화’론을 편다. 평균수명은 늘고 있지만 그건 부모세대 얘기일 뿐, 부모들과는 다른 식습관과 자기 돌봄이 어려운 생활환경, 스트레스 등으로 3040은 노화가 빨리 진행되며 수명이 단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난다). 정 교수는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자극적인 식문화, SNS·쇼트폼 중독 등 고자극 사회가 가속노화를 부추긴다”며 “3040, 혹은 1020의 가속노화는 훗날 이들의 발병률을 높이고 노인부양비를 높일 수 있는 만큼 국가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뜩이나 MZ세대는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로 지목되는데, 이제는 부모보다 빨리 늙고 빨리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최근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동향 2023’ 조사에 의하면 20대가 노년층을 제치고 가장 가난한 세대로 나타났다. 소득은 가장 낮고 빚이 느는 속도는 제일 빨랐다. 다음으로 빚 증가 속도가 빠른 건 30대였다. 20대 여성의 27%, 20대 남성의 41%만이 결혼에 긍정적이었는데, 결혼하지 않는 이유 1위는 공히 ‘결혼자금 부족’이었다. 이들에겐 가속시대에 감속 페달을 밟으며 자기중심을 잡으라는 뻔한 위로조차 사치 같은 상황, 과연 출구는 있을지 마음이 무겁다.

글 =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 임근홍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