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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도 언다며 딸은 집 나갔다"…과천 꿀벌마을 700명의 겨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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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경기 과천시 비닐하우스촌 '꿀벌마을'에서 윤모(66)씨가 2구짜리 연탄 보일러에 연탄을 갈고 있다. 꿀벌마을은 서울의 달동네 개발 등으로 밀려난 주민들이 수십년 전부터 모여 살기 시작한 비닐하우스촌이다. 김현동 기자

18일 경기 과천시 비닐하우스촌 '꿀벌마을'에서 윤모(66)씨가 2구짜리 연탄 보일러에 연탄을 갈고 있다. 꿀벌마을은 서울의 달동네 개발 등으로 밀려난 주민들이 수십년 전부터 모여 살기 시작한 비닐하우스촌이다. 김현동 기자

“바람을 막고 또 막아도 또 어디서 후벼 파고 들어오니털모자 쓰고, 점퍼 껴입은 채로 버틸 수 밖에요.”
수도권에 한파 경보가 발령된 18일 오전, 과천의 비닐하우스촌 ‘꿀벌마을’에 사는 박모(58)씨가 밤새 타고 남은 연탄을 보일러에서 꺼내며 말했다. 그가 지내는 33㎡(10평) 남짓한 비닐하우스 앞엔 연탄보일러가 설치된 창고가 있다. 연탄보일러의 온기가 닿는 아랫목은 겨우 몸을 뉘일 수 있는 1㎡ 크기에 불과했다. 박씨는 “5년 전 서울 강남에서 분식집을 하다 망해서 이리 흘러 들어왔다”며 “재수하던 딸은 이사 와서 겨울을 4번 겪더니 숨이 얼어서 도저히 살 수 없다며 독립했다”고 말했다.

꿀벌마을은 벌집 처럼 생긴 검정 가림막을 두른 비닐하우스에서 사람들이 모여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약 400가구, 주민 700여명이 모여사는 걸로 추산된다. 상·하수도나 도시가스, 포장 보행로 등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집 아닌 집’에서 보일러도 없이 전기난로·장판에만 의존해 한겨울을 나는 노인·장애인 주민들도 수두룩하다.

39년째 꿀벌마을에 거주하는 문인순(48)씨는 “푹푹 찌는 여름보다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야 하는 겨울이 더 고달프다”며 “땅이 꽁꽁 얼어 노인분들이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겨울철만 되면 팔다리에 깁스를 한 어르신들이 많아진다”고 했다. 15년 전 아들과 함께 이사 온 김모(68)씨는 “연탄보일러는 10~12시간에 한 번씩 갈아야 해서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꿈도 못 꾼다”며 “몸을 웅크리고 동장군이 은혜를 베풀며 지나가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8일 경기 과천시 비닐하우스촌 '꿀벌마을'에서 한 주민이 길을 걷고 있다. 꿀벌마을엔 약 400가구(70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서울의 달동네 개발 등으로 밀려난 주민들이 수십년 전부터 모여 살기 시작했다. 김현동 기자

18일 경기 과천시 비닐하우스촌 '꿀벌마을'에서 한 주민이 길을 걷고 있다. 꿀벌마을엔 약 400가구(70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서울의 달동네 개발 등으로 밀려난 주민들이 수십년 전부터 모여 살기 시작했다. 김현동 기자

꿀벌마을에서 15㎞ 떨어진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 주민들도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 비상이 걸렸다. 8년째 쪽방촌에 거주 중인 신동왕(67)씨는 “미지근한 방바닥보다 공용 화장실의 한기가 진저리난다”고 했다. 그는 “쪽방 주민들과 같이 쓰는 공용 화장실이 있는데, 뜨거운 물이 안 나오고 찬물만 나와서 목욕을 하려면 겨울엔 한 달에 2장 나오는 목욕 쿠폰을 가지고 영등포시장까지 걸어가야 한다”며 “구청장이 몇 년 전에 갖다 준 솜이불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석유 보일러가 있는 일부 쪽방 주민들은 난방비 부담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쪽방에 거주하는 김성식(70)씨는 “석유 20ℓ 한 통에 3만2000원인데, 8통을 넣어야 한 달을 버틸 수 있다”며 “따뜻하게 지내려고 온도를 올리면 매달 25만원 이상 난방비가 든다”고 토로했다. 김씨의 아내 배의자(67)씨는 “석유 보일러가 있어서 바닥은 따뜻한데, 외풍이 세서 코가 시리다”고 했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7일 쪽방 등 취약가구에 대한 주거 개선 대책을 주문했다. “대통령이 매서운 한파에 따른 서민 피해 가능성을 우려하며 주택 개선 방안을 서둘러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게 여권 관계자의 설명이다. 서울시도 지난 15일부터 ‘노숙인·쪽방 주민 겨울철 특별보호대책’을 시행 중이다. 영등포를 비롯해 종로구, 중구, 용산구 등 4개구에 밀집한 쪽방촌 주민 수는 서울시 추산(9월 기준) 2360명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갑작스러운 한파로 인한 동사 위험 등 긴급 돌봄이 필요한 경우를 대비해 675명이 사용할 수 있는 응급 구호시설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18일 경기 과천시 '꿀벌마을' 주민 배광자 할머니가 연탄갈기 어려워 전기장판을 사용하고 있다며 겨울 난방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18일 경기 과천시 '꿀벌마을' 주민 배광자 할머니가 연탄갈기 어려워 전기장판을 사용하고 있다며 겨울 난방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다만 주거 개선 대책으로 10만㎡ 이내의 노후 저층 주거지를 묶어 정비하는 소규모 주택정비 사업(가로주택정비사업)이 언급되는데 대해선 불안해하는 주민들도 있었다. 영등포 쪽방 주민 우태일(61)씨는 “5년 전부터 영등포 쪽방촌을 서둘러 개발한다는 얘기가 꾸준히 나왔다”며 “계속 살 수 있을지 또 이사를 해야 하는 건지 걱정”이라고 했다. 꿀벌마을은 이미 3기 신도시 과천 과천지구(169만㎡) 사업지에 포함됐다. 조도원 꿀벌마을 대책위원회 위원장은 “국토교통부와 LH는 경제적 실정에 맞는 주택으로의 주민 이주를 약속해달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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