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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윤의 아트에콜로지

서구 은행은 왜 미술품을 모으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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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

미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전시회와 아트페어를 찾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런 현상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2019년 테이트 모던의 기획으로 6개월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 전에 37만 명이 다녀갔다. 올해 휘트니 미술관에서 온 ‘에드워드 호퍼’ 전시도 20만 명 넘게 방문했다. 아트페어의 인기도 대단하다. 지난해 서울에 입성한 프리즈 서울도 나흘 동안 10만원 넘는 입장권이 10만장 이상 팔렸다고 한다.

사업가들에게도 미술품은 중요한 검토 대상이다. 미술의 예술적 가치는 물론 ‘사람을 모으는(Retainment)’ ‘주목자본(attention capital)’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미술의 다양한 가치에 일찍 눈을 뜬 곳은 은행이었다. 1970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된 ‘아트 바젤’ 아트페어의 공식 스폰서는 1994년부터 UBS였고, 2003년 런던에서 시작한 ‘프리즈’ 아트페어는 2004년부터 도이체방크와 함께해왔다.

도이체방크, 스위스의 UBS
일급 미술관에 맞먹는 소장품
전문인력 두고 세밀하게 관리
동시대 작가들 지원·육성 의미

미국 뉴욕의 UBS 사옥 외부를 장식한 사라 모리스의 그림. [사진 UBS 홈페이지]

미국 뉴욕의 UBS 사옥 외부를 장식한 사라 모리스의 그림. [사진 UBS 홈페이지]

은행들의 아트페어 후원은 고액 자산가들에 대한 서비스 중 하나다. 웰스 매니지먼트의 일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단순히 일정 금액을 지원하는 것만이 아닌 기업 자체의 핵심 가치로 여긴다는 점이다. 장기적 맥락의 예술 생태계를 지원하며 은행의 품격을 높이는 노력을 해오고 있다.

앞에 말한 은행들은 콜렉션 전문가, 큐레이터 집단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 도이체방크를 살펴보자. 그들은 4명의 큐레이터를 두고 1970년부터 작품을 구입, 현재 5만7000여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콜렉션 목적이 각별하다. 단지 투자 차원을 넘어선다.

무엇보다 도이체방크는 ‘work on paper’를 구매한다. 1970년도 시작할 때, 작품 하나를 사는 평균 가격은 약 300만원이었다고 한다. 즉, 드로잉·판화·사진 등 종이 위의 작품을 구입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사람들은 세계적인 은행은 비싼 작품만 사들인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동시대 최고 작가들의 종이 작품을 구매해 왔다. 대형 로비나 회의실 등에 세계 최고 수준의 조각과 회화도 있지만, 콜렉션의 기본 방향인 ‘work on paper’를 지켜왔다.

디테일도 살아 있다. 프랑크푸르트 독일 본사의 엘리베이터 버튼에는 독일 작가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회의실 이름도 작가 이름에서 따왔다. 도이체방크 직원들은 동시대 작가들 몇몇은 알고 있을 듯하다. 또 도이체방크는 2년 전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큐레이터 펠로우십 프로그램이다. 영국에 기반을 둔 유색인종, 다양한 문화권의 젊은 큐레이터들을 선정하고 18개월 유급 지원한다. 작가를 연구·발굴하는 큐레이터의 중요성을 인지한 결과다. 올가을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 도이체방크 라운지도 흥미로웠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잉카 쇼니바레의 전시로 멋진 라운지를 만들었다. 글로벌 작가들로 시야를 더 넓히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UBS의 미술에 대한 관심은 더 오래됐다. 1960년부터 콜렉션을 시작했고, 현재 3만점을 소장하고 있다. 일단 콜렉션 숫자가 엄청나다. 현재 우리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은 이건희 콜렉션 1400여점을 포함해 1만여점에 이른다. UBS는 2015년부터 아트 변호사이자 미술사가인 매리 로젤이 콜렉션 책임을 지면서, 더 속도를 내고 있다. 10인 정도로 운영되는 콜렉션은 국제적 미술관과 버금간다. 장르·매체 관계없이 구매하고 있다. 특히 올해 UBS 경영권이 크레딧 스위스(Credit Swiss)로 넘어가면서 UBS콜렉션에 대한 걱정이 일기도 했지만 앞으로 재정비를 거쳐 콜렉션 규모를 더 키워나가겠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난주 4년 만에 뉴욕을 방문해 뉴욕 미드타운을 중심에 있는 UBS 아트갤러리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멋진 사라 모리스의 대형 작품이 커미션 되어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 자신에게도 초대형 회화에 도전하는 엄청난 기회가 됐다.

미술은 특정 작가의 고독한 작업이자 대중이 함께 즐기는 예술이다. 정부는 물론 기업의 꾸준한 지원이 필요하다. 우리도 작가의 창조성을 자극하고 시장 자체를 확장하는 차원에서 미술에 대한 제도적·경제적 후원을 다져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자금의 여유가 있을 때 거론하는, 즉 경제가 어려우면 마지막으로 밀리는 미술로서는 우리 문화의 앞날을 얘기하기 어렵다. 시대와 역사는 흘러간다. 그 현장을 지키는 작가를 육성하고, 그 예술적 가치를 후대에 물려줄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