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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병억의 마켓 나우

‘황금 구속복’으로 스스로 돈줄 막는 독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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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안병억 대구대 교수(국제관계)

안병억 대구대 교수(국제관계)

독일이 내년도 예산안을 지난 13일에야 겨우 합의했다. 지난달 30일이 예산안 통과 시한이었다. 매우 드문 일이다. 무엇이 문제였나. 문제의 근원은 기본법(헌법)에 규정된 균형재정 조항이다. 109조와 115조는 연방정부의 순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0.35%를 초과하면 안 된다고 규정한다. ‘부채 제동장치’(Schuldenbremse, debt brake)라고도 불리는 부채 상한선을 경기침체·자연재해·전쟁과 같은 위기를 제외하고는 넘을 수 없다. 연방정부는 2016년부터, 16개 주 정부는 2020년부터 이를 실행 중이다.

코로나19로 독일은 2020년부터 작년까지 이 규정을 적용받지 않았고 기업과 개인 지원에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2021년 12월 중도좌파의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가장 친기업적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신호등 연정’을 구성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팬데믹 지원에 쓰고 남은 돈 600억 유로(약 84조원)를 녹색당이 우선시하는 기후위기 대응, 자민당이 우선시하는 기업의 디지털전환에 지출하기로 합의됐다. 당연히 정부예산으로 편성해야 하지만 GDP의 1.5%에 이르는 액수라 예산에 잡히지 않는 부외 예산으로 책정했다.

마켓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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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인 기민당·기사당이 균형재정 위반이라며 연방헌법재판소(헌재)에 제소했고, 헌재는 지난달 15일 야당 편을 들어줬다. 600억 유로를 정식 예산으로 책정하라고 판시했다. 당장 올해 예산 중 부외 예산으로 지출된 돈을 추경예산으로 메꿔야 했다. 또 여권은 2023년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위기를 고려해 지난달 말에야 균형재정의 예외를 적용했다. 야당은 이런 소급적용도 헌재 제소 감이며, 더는 신호등 연정이 존속할 이유가 없다며 총선을 요구 중이다.

연립정부가 거의 4주 만에 합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부 지출의 대폭 삭감과 함께 요식업 부가세를 내년 1월부터 7%에서 19%로 올린다. 또 2025년까지 지급하려던 전기차와 태양광산업 보조금을 내년 중에 조기 중단한다. 플라스틱 포장재에 내년 1월부터 새로 세금을 부과한다. 녹색당과 자민당의 요구를 적절하게 맞췄다. 내년도 예산에서 구멍이 난 170억 유로를 이렇게 메꿔 매우 뒤늦게 예산안이 합의됐다.

학자들은 부채 제동장치를 ‘황금 구속복’(golden straitjacket)으로 부른다. 스스로 만든 규정에 갇혀 있는 돈 쓰는 데도 쩔쩔맨다. 유럽연합(EU) 최대의 경제 대국 독일이 돈 지갑을 열지 못하면 곧바로 EU에 영향을 미친다. EU는 앞으로 4년간 우크라이나에 500억 유로(약 70조원)를 지원하려 하는데 당장 독일 돈줄이 막힐 뻔했다. 재정준칙도 좋다지만 무엇을 위한 규칙이란 말인가?

안병억 대구대 교수(국제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