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울산 대정전 쇼크에도…28년된 설비에 손 못대는 '빚더미' 한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6일 오후 울산 일부 지역에 정전이 발생한 가운데 울산시청 앞 도로에 신호등이 꺼져있다. 사진 뉴시스

6일 오후 울산 일부 지역에 정전이 발생한 가운데 울산시청 앞 도로에 신호등이 꺼져있다. 사진 뉴시스

30년 가까이 써오던 변전소 설비에 탈이 나자 울산 시내가 큰 혼란을 겪었다. 6년 만의 대규모 정전 뒤엔 전력 설비 노후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빚더미에 놓인 한국전력의 설비 투자가 주춤하면서 또 다른 정전 사태가 이어질 거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6일 울산에서 2시간가량 이어진 정전으로 도로 신호등이 꺼지고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등 15만5000여 세대의 일상이 흔들렸다. 2017년 서울·경기에서 발생한 20여만 가구 정전 이후 최대 피해다. 7일 한전에 따르면 이러한 불편을 만든 원인은 울산 남구 옥동변전소의 개폐기 내부 절연체 파손으로 추정된다. 전기를 끊거나 넣는 '스위치'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다.

이곳은 1995년부터 28년간 운영 중인 노후 변전소다. 한전 측은 "25년 넘은 개폐기는 정밀검사 후 문제가 없으면 더 쓸 수 있다"고 하지만, 오래된 설비가 정전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영환 홍익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현재로썬 설비 노후화나 작업 중 실수, 둘 중 하나가 원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비슷한 사례도 있다. 지난 2021년 11월 경기 여주에서 변전소 노후 개폐기 고장으로 5만여 가구가 정전을 겪은 바 있다.

전력 생태계에선 터질 일이 터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전의 열악한 재무 상태가 정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전의 누적 적자는 2021년 이후 약 45조원에 달한다. 올 상반기 기준 총부채도 200조원을 넘겼다.

한전 협력업체 A사 대표는 "기자재는 수명 관리가 중요한데 한전이 지난해 이후 재무 위기를 겪으면서 오래된 제품을 제때 안 바꾸는 경향이 심해졌다"고 밝혔다. 한전에 개폐기 등을 납품하는 B업체 사장도 "한전이 사용 연한을 정확히 규정해야 하는데 그런 지침이 없다"면서 "미리 바꿔주기만 해도 정전 가능성이 매우 적은데, 고장 날 때까지 계속 쓰면서 위험이 커졌다. 재무 여건상 멀쩡해 보이는 제품을 새 걸로 갈아 끼우기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전력의 '동맥'이라고 불리는 송변전·배전 설비에 대한 투자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한무경 국민의힘 의원이 한전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9년 2조5813억원이던 한전의 송변전 투자비는 지난해 2조4976억원으로 뒷걸음질 쳤다. 배전 투자비도 같은 기간 3조6316억원에서 3조5159억원으로 감소했다.

전력망 유지·보수에 필수적인 기자재 구매량도 내리막이다. 2020년 1억5100만건 수준에서 지난해 1억1200만건 안팎으로 줄었고, 올해도 8500만건(10월 25일 기준)에 그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전력 생태계까지 위기에 몰렸다. A사 대표는 "납품 단가는 안 오르고 발주 물량만 줄어드는데 필수 인력은 유지해야 하니 원가 이하로라도 수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기자재 품질은 곧 안전과 직결되는데 고품질 설비를 만들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문제는 앞으로다. 한전은 지난 5월 25조 원대 자구안을 발표하면서 변전소 등 일부 전력 시설의 건설 시기를 미뤄 2026년까지 1조3000억원을 절감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전력 설비는 대체로 외국보다 연차가 적은 편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체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B업체 사장은 "국내 전력 설비 구축이 1980년대부터 본격화한 만큼 수명이 30여년 이상 된 제품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은 전력 수요지가 수도권 등 일부 지역에 집중된 특성상 큰 부하를 견뎌야 하는 설비의 '스트레스'도 빨리 쌓인다.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단지를 비롯해 전력 사용량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점도 불안요인으로 꼽힌다. 전력망 투자 시기를 놓치면 개폐기 등 작은 설비 하나만으로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박종배 건국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설비 투자를 미루면 오히려 그 비용보다 정전 등으로 발생하는 피해가 더 클 수 있다. 이번 정전이 서울 시내나 대형 산업단지에서 발생했으면 매우 큰 문제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근본 대책으로 꼽히는 전기요금 인상은 잠잠하다. 올 3분기 전기료가 동결된 데 이어 4분기도 산업용(대용량)만 ㎾h당 10.6원 올리는 데 그쳤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창의융합대학장은 "이대로면 수년 안에 대규모 정전이 빈발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면서 "한전에 적자가 쌓여서 투자를 못 하는 것이니 답은 요금 현실화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한전 측은 "어려운 재무 여건에도 안정적 전력 공급을 위한 전력 설비 투자는 차질없이 추진해왔다. 앞으로도 설비 투자를 지속할 예정"이라면서 "지속적인 투자를 위해선 누적적자 해소를 통한 재무 여건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