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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두진호의 글로벌 포커스

잊혀진 우크라이나 전쟁…자유진영 부담 커지자 “종식” 목소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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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두진호 한국국방연구원 국제전략연구실장

두진호 한국국방연구원 국제전략연구실장

“무관심은 사람을 죽입니다. 계산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중재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가능한 것이지, 선과 악 사이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울려 퍼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연설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해 3월 20일 이스라엘 크네세트(의회) 화상 연설에서 살상 무기 지원 및 러시아 경제 제재 동참 등 국제사회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그때 이미 그는 머잖아 닥쳐올 ‘무관심’을 예견했던 것일까. 지난 10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국제사회엔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됐다. 중국과 총성 없는 패권 경쟁까지 치르는 미국으로선 확전 방지 등 중동 지역의 사태수습에 사활을 걸어야 할 입장이다.

우크라 대반격 러시아에 막혀
점점 요원해지는 우크라 승리
‘두 개의 전쟁’ 치르는 미국도
이스라엘 쪽으로 관심 기울어

키이우 평화 공식회담 물 건너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1월 다보스 포럼에 화상으로 참여해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고군분투 중이지만 전쟁 장기화에 따라 국내외에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1월 다보스 포럼에 화상으로 참여해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고군분투 중이지만 전쟁 장기화에 따라 국내외에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무력 충돌 10여 일 만에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11월 30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개전 이후 네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두 개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미국의 일차적 관심은 우크라이나가 아닌 이스라엘로 기울어졌다. 지난 10월 몰타에서 개최된 3차 ‘평화 공식 고위급 회의’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연내에 키이우에서 개최를 목표로 추진한 ‘평화공식정상회담’도 물 건너갔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0월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지원을 위한 안보 예산 1050억 달러를 패키지로 처리해 달라고 의회에 요청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좌우하는 공화당 주도의 하원은 이스라엘 지원 법안만 처리했다. 우크라이나 지원 법안은 미국 의회에 계류 중이다. 백악관은 ‘두 개의 전쟁’에 따른 피로감을 부인하지만,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회의적 여론이 우세하다. 내년 11월 예정인 미국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민주당 진영도 우크라이나와 거리를 둘 공산이 커졌다는 관측도 나온다.

우크라, 뺏긴 영토 포기해야 하나

미국과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평화협상 필요성이 부상하고 있다. 서방의 막대한 안보 비용 지출에도 우크라이나의 승리는 요원하며, 오히려 우크라이나를 돕는 민주주의 진영의 정치·경제적 비용부담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주도국가인 독일은 우크라이나 전쟁 영향으로 최악의 경제난을 겪으면서 주요 7개국(G7) 중 유일하게 역성장이 예상된다.

최근 슬로바키아와 네덜란드 총선에서 극우 정당이 승리하면서 향후 우크라이나를 향한 유럽연합의 연대와 지지가 후퇴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도 나온다. ‘두 개의 전쟁’ 구조 속에서 평화협상이 복원된다면 러시아와 불가침조약 체결 및 전쟁 배상금 확약을 등을 전제로 우크라이나는 빼앗긴 영토를 포기하는 굴욕적인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최근 전황 브리핑에서 러시아군은 점령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군의 대반격 작전은 러시아군의 견고한 방어에 막혀 좌절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AP통신 인터뷰에서 대반격 작전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서방이 적시에 대량의 무기를 공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러시아군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의 사상자는 최소 23만 명으로 추정되고, 우크라이나군은 개전 이후 러시아군의 인명 손실을 약 33만 명으로 평가한다.

젤렌스키 지지율 40%선 곤두박질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우크라이나 국민과 장병이 고통받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인프라 등 민간 시설에 대한 집중적인 탄도미사일 공격을 통해 추위와 공포를 무기화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목표 달성을 위해 ‘중단없는 전진’을 강조했지만 잘루즈니 총참모장은 냉정한 상황 인식을 기초로 ‘전략적 방어태세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군인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아야 하며 정치군인이 국가 통합을 위협하는 항명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며 총참모장의 작전구상을 정치 개입이라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지도부의 적전분열(敵前分裂)이 우려되는 이유다. 전쟁 초기 90%를 기록했던 젤렌스키 대통령 지지율은 최근 40%대로 곤두박질쳤다. 대반격 작전 실패와 전쟁 장기화에 따른 우크라이나 국민의 불만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향하는 형국이다.

북한 군사모험주의에 대비해야

바이든 행정부의 국방정책은 통합억제(Integrated Deterrence)로 상징된다. 통합억제란 핵 억제는 물론 재래식 위협과 우주 및 사이버 등 새로운 공간의 위협 관리를 위한 정책적 목표와 방향을 포괄한다. 하지만 통합억제의 이면에는 미국의 국력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에 동맹 및 우방 등 모든 가용 자원과 역량을 수평적·수직적으로 최대한 끌어모아 중국과 러시아 등 국제 질서의 수정주의 세력에 맞서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통합억제는 미국이 독자적으로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한국의 동맹이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자칫 한반도에 무관심할 때 북한이 군사적 모험주의로 나설 우려가 커진다. 지난달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3차 발사에 대응해 국가안보를 위한 최소한의 방어 조치 차원에서 9·19 남북 군사합의 효력의 일부를 정지했다. 여기에 북한이 9·19 합의 전면 파기를 선언하면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확장억제 등 미국의 방위공약이 정상적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동맹 정책의 제도적 완전성과 연속성을 제고해야 한다.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해 유엔군사령부(UNC) 회원국의 전력 제공 절차를 구체화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한-유엔사 방문군지위협정(VFA)’ 체결을 검토해 전쟁 지속능력을 확충해야 한다. ‘두 개의 전쟁’ 영향으로 한반도의 엄중한 안보 상황이 국제사회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동맹 및 파트너 국가들과 정보 공유 및 전략적 소통에 더 힘써야 할 때다.

두진호 한국국방연구원 국제전략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