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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재훈의 음식과 약

약 사용설명서가 어려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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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약 사용설명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할까. 볼수록 헷갈린다.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진통제(아세트아미노펜) 사용설명서를 봐도 그렇다. 매일 세 잔 이상 정기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이 이 약이나 다른 해열진통제를 복용해야 할 경우 반드시 의사, 약사와 상의해야 한다는 첫 번째 경고문이 나온다.

여기까지 읽고 소비자를 위한 설명서인가보다 생각하는 순간 두 번째 경고문이 이어진다. 매우 드물게 급성 전신성 발진성 농포증, 스티븐스-존슨 증후군, 독성 표피 괴사용해와 같은 중대한 피부 반응이 보고되었고, 치명적일 수 있으니 이에 대해 환자들에게 충분히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어려운 전문용어다. 신문 칼럼에 자주 썼다가는 독자가 여러 명 떨어져 나갈 게 틀림없다. 진통제를 먹는 사람 중에 위의 세 가지 피부반응이 구체적으로 뭘 이야기하는 건지 이해하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 두 번째 경고문은 의사, 약사를 대상으로 한 글이다.

각종 약 사용설명서는 왜 그리 어렵게 쓸까. [연합뉴스]

각종 약 사용설명서는 왜 그리 어렵게 쓸까. [연합뉴스]

이 무시무시한 경고문은 2018년부터 추가됐다. 약 사용설명서에 이런 내용이 추가된 것 자체는 안전 면에서 좋은 일이다. 드물지만 심각한 부작용이 뭔지 미리 알면 만에 하나라도 그런 증상이 있을 때 즉시 약 먹는 걸 중단하고 의사, 약사와 상의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해당 증상이 무엇인지만 안다면 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나라 약 사용설명서에는 부작용 증상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없다. 불친절한 설명만 있다. 혈액 관련 부작용으로 혈소판 감소, 과립구감소, 용혈성 빈혈 외에도 세 가지 더 전문용어가 이어진다. 이런 증상이 있을 경우에 약의 복용을 중지하고 의사, 치과의사, 약사와 상의하란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의사나 약사도 약 복용 중에 혈소판이 감소하거나 과립구감소가 나타나는 걸 피 검사 없이 증상으로 알기 어렵다.

이렇게 장황한 설명이 이어지는 이유를 짐작 가능한 문구가 있다. 상담시 가능한 한 사용설명서를 소지하라는 것이다. 약을 과잉복용했을 때 어떤 의학적 처치가 필요한지까지 설명서에 나와 있으니 이는 소비자가 아니라 의료인을 위한 문서임이 분명하다.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주의 깊게 읽어보라는 사용설명서는 사실은 소비자를 위한 게 아니라 전문가 참고용이었던 셈이다.

수십 년 전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고 참고 서적도 부족했던 시절에는 이렇게 전문가용 설명서를 소비자가 미리 준비해서 병원과 약국에 가야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니다. 중대한 피부반응이라며 전문용어를 열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피부가 붉어지거나 물집, 발진(작은 종기)이 생기면 약 먹기를 중단하고 의사, 약사와 상의하라는 경고문이면 충분하다. 약의 실제 사용자가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만드는 어려운 설명서는 이제 사라질 때가 됐다.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