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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 중앙시조대상] 학대 피해 아이들 위로…어른으로서 속죄하는 마음 담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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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중앙시조대상

고래
이태순

비 내리는 기차역 물이 출렁거리고
눈이 슬픈 아이가 꿈속에서 보았다는
커다란 푸른 고래가 기차역에 들어왔다

칸칸마다 불빛을 따스하게 매달고
아이를 부르는 고래의 비린 노래
바닷가 역으로 떠날 고래가 멈추었다

가냘픈 영혼 되어 어둔 방을 벗어난
아이야 고래 타고 바닷가 역에 가자
피멍이 얼룩진 아이 야윈 손이 차갑다

◆이태순

이태순 시인은 “시조란 삶의 군더더기를 없애고 성찰하는 일”이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태순 시인은 “시조란 삶의 군더더기를 없애고 성찰하는 일”이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경북 문경 출생. 200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오늘의시조 시인상(2007), 중앙시조신인상(2010), 오늘의시조문학상(2022) 수상. 시조집 『경건한 집』 『따뜻한 혀』 『한 끼의 시』 등을 냈다.

국내 시조 문학상 가운데 최고 권위로 꼽히는 중앙시조대상의 제42회 수상작에 이태순(63) 시인의 ‘고래’가 선정됐다. 중앙시조신인상 수상작으로는 김상규(39) 시인의 ‘불꽃놀이’가 뽑혔다. 등단 무대인 제34회 중앙신춘시조상은 ‘조문국을 다녀오다’를 쓴 권규미(65)시인에게 돌아갔다.

중앙시조대상은 등단한 지 15년 이상인 시조 시인 중 시조집을 한 권 이상 펴냈으며 한 해 5편 이상을 발표한 이가 후보 자격을 갖는다. 중앙시조신인상은 등단 5년 이상 10년 미만이며, 한 해 5편 이상을 발표한 시조 시인이 후보다. 중앙신춘시조상은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매달 열린 중앙시조백일장 입상자들로부터 새 작품을 받아 그 중 최고작을 가리는 연말 장원 성격이다.

이태순 시인은 200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으로 등단했다. 데뷔 5년 차인 2010년 중앙시조신인상을 수상했고 그 후 13년 만에 중앙시조대상까지 품에 안게 됐다. 지난 6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이 시인은 “20년 가까이 곁눈질하지 않고 외롭게 시조만 썼던 날들에 주시는 상 같다”며 미소 지었다.

경북 문경의 산골에서 태어난 이 시인은 “지금까지 쓴 시조의 바탕에 늘 고향이 었었다”고 했다. “지금도 문득 그곳의 바람과 시내의 물비린내, 도토리 나무가 늘어선 풍경이 보이고 할아버지 두루마기의 사각거림이 느껴진다”면서다. 이 시인은“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 자연과 사람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눈이 열린 것 같다”고 했다.

이 시인은 불혹 넘어 시조를 시작한 늦깎이다. 40대 초 문화센터 시조 강좌를 듣기 시작했고 이후 문학에 열의가 깊어져 방송통신대에 등록해 국문학을 배웠다. 그는 시조와의 만남을 “운명 같았다”고 회고했다. “시조의 정형성 안에 세계를 끌어오는 작업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무겁고 신중하게 단어를 쳐내는 작업이 어려운 만큼 재미도 있었다”면서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시조는 “살아갈 힘”이 돼 줬다. “이유 없이 몸이 아프고 손가락 하나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졌을 때도 시조만큼은 놓지 않았다”고 했다. “시조를 쓰면서 치유하는 것이 버릇이 돼 지금도 어떤 풍경을 마주하면 그 위로 자연스럽게 원고지가 겹쳐 보인다.”

당선작 ‘고래’는 아동 학대 피해자들을 어루만지는 시조다. 이 시인은 “어른으로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썼다”며 “고통 속에서 스러진 아이들의 가냘픈 영혼이나마 위로하고 싶었다”고 했다. 작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아동 학대 뉴스가 나왔던 올해 초 썼다.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 서울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데 아이의 환영 같은 게 보였다.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고래를 태워주면 좋겠다. 영혼이라도 훨훨 날아다니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인은 “사는 동안 고통과 슬픔이 오더라도 그만큼 제 시조의 빛이 선명해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제42회 중앙시조대상과 신인상의 예심은 시조 시인 김영란·김보람씨가, 본심은 시조 시인 염창권·이종문씨와 문학평론가 박진임씨가 맡았다. 중앙신춘시조상은 강현덕·서숙희·손영희·정혜숙 시인이 심사했다. 세 부문의 시상식은 14일 오후 5시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21층에서 열린다.

중앙시조신인상

불꽃놀이
김상규

두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이리 주렴
내가 행복을 주지, 밀밭 위의 소녀야
버려야 얻을 수 있는 신비를 알려주지

어깨에 앉아 있던 연갈색 종달새는
길들이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갔단다
소녀야, 채찍은 거둬 덤불숲에 던져주렴

밀짚 얹은 나귀는 주저앉은 나귀일 뿐
짐을 진 소녀야, 방황을 한 줌 주지
들판이 빨갛게 물든 자유를 보여주지

박하의 박하마저 겨울의 겨울마저
입김마다 번지는 시작의 귓속말
소녀야, 용기를 주지, 곧 타오를 불꽃처럼

지치지 않는 ‘좌절의 왕’ 될 것 

수상 소식을 듣고 할머니를 찾아뵀습니다. 말씀을 잃으셨기에 눈인사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날 저는 말할 수 없는 이의 목소리가 되겠다고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등단 이후 늘 다짐했습니다. 시조로 승부를 보겠노라고, 다른 것은 엿보지 않겠노라고. 시조단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 궁리하고 또 궁리했습니다.

정형의 틀을 갖추면서도 낯선 세계를 여는 건 언제나 고통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조에 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저와 같은 고민하는 하는 젊은 시조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외로운 길을 걸었을 겁니다. 함께 해준 ‘객’ 동인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저를 끝까지 믿어주신 정수자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였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시조란 견고한 울타리 속 자기만의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울타리 안에서 밖을 상상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규칙 없는 경기란 난장판입니다. 시조는 그 난장판에서 단단한 균형추가 되어줄 거라 믿습니다.

저는 압니다. 시조와의 승부에서 쓰러질 것이란 걸. 좌절하고 또 좌절할 겁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겠습니다. 자기만족에 취하지 않는 ‘좌절의 왕’이 되겠습니다.

◆김상규

김상규

김상규

제주 출생. 제주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중앙시조대상·신인상 심사평

고래·기차 이미지 중첩지점 절묘하게 포착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의를 거쳐 이태순 시인의 ‘고래’를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선고위원들이 제출한 십여 분 중견 시인들의 작품 중에서 심사위원들은 먼저 각각 다섯 분의 대표작을 가려내어 후보작으로 추천하기로 했다. 그 결과 2인 이상의 추천을 받은 두 분으로 수상 대상자의 범위는 쉽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두 시인의 작품 세계가 큰 대조를 보여 의견은 양분되었고 절충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둘로 나뉜 의견의 핵심에는 현대시조의 가장 중요한 요소 혹은 덕목이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이 놓여 있었다.

즉, 현대인의 삶의 단면을 포착하여 시적 언어로 적시하는 모더니티 지향성이 주도적으로 드러난 작품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인가, 아니면 시조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들을 충실히 갖추고 있으면서 주제, 이미지, 언어의 음악성 등에서 완결도가 높은 작품을 선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합의에 이르러야 했다.

이태순 시인은 우리 시의 전통에서 친숙한 이별과 상실의 정서를 노래하면서도 이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고래와 기차의 이미지가 중첩되는 지점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주목을 받았다. 멈추었다 떠나는 기차가 고래로 변환되고, 다시 아이의 꿈과 맞물리면서 아이·기차·고래·죽음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텍스트의 시적 언어도 충분히 연마되고 승화되었다는 점을 들어 ‘고래’가 수상작이 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신인상의 선정과정은 대상의 경우와 비교할 때 순탄한 편이었다. 같은 방법으로 대상자가 두 분으로 축소되었는데 두 분 모두 높은 수준의 시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선보여 누구를 선정하더라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김상규 시인의 ‘불꽃놀이’가 가장 신선하고 상징성 강한 텍스트라고 보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김 시인이 신인으로서의 패기를 드러내 보이면서도 정교한 시적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도 높게 평가했다.

◆심사위원=염창권·이종문·박진임(대표집필)

중앙신춘시조상

조문국을 다녀오다
권규미

북쪽의 북쪽으로
흰 말을 타고 갔다

바람 강 얼음산을 넘고 또 넘어서
찔레꽃 우거진 뜨락
왕의 잠에 닿았다

만발한 묵언뿐인 오래된 꽃의 나라
원래 가시나무의 먼 혈족이었던 나는
뚝뚝 진 그 묵언들을 치마폭에 거두었다

능원은 아득하고 때때로 반짝였으나
말과 글과 풍속이 서로 멀어진 탓에

면벽한 물방울들만
총총 세다 돌아왔다

없는 연인에게서 답신 받은 느낌 

100년 묵은 갑옷을 꺼내 출정준비를 하는 돈키호테처럼 녹슨 투구를 닦아 쓰고 눈 앞의 시간들을 다정한 판초이듯 바라봅니다. 없는 적과 없는 연인에게 창을 겨누고 편지를 쓰던 황망한 날들이, 그 기나긴 발자국들이 금빛 모자를 쓰고 아지랑이처럼 지나갑니다.

캄캄한 밤의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이 정신없이 오르다 보면 오를수록 더 어긋나기만 하던 글쓰기, 사는 일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참 많이도 헤맸습니다. 시조는 제게 참 어려운 남자 같았습니다. 시간의 시금석을 견뎌낸 막막하고 먼 신비로움이었습니다. 별빛을 쫓는 소녀처럼 천지사방을 헤매었으나 꽃이 되기엔 아직도 먼 화석 같은 말 몇 마디를 주워들고 대책 없이 중얼거리다 잠이 들고는 하였지요.

삼에서 삼베가 나온다고, 삶에서 시가 나온다고 무작정 목을 늘이고 기다린 적도 있었지요. 이제 기나긴 동굴 하나를 간신히 지나온 듯합니다. 없는 연인에게서 온 답신처럼 당선 통지를 받은 날, 30여 년 전에 다른 마을로 거처를 옮기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평생을 손에서 책을 놓으신 적 없었지만 그 책 속의 꿈들은 아버지의 쟁기질에, 아버지의 푸나무단에 손가락 하나도 올려놓지 않았었지요. 묵묵하고도 단호하게 서툰 농사를 신앙처럼 품은 채 적막과 가난을 평생의 동지처럼 마주한 아버지, 무덤 속의 당신을 불러내어 햇볕 드는 마루에서 맑은 술 한 잔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신 중앙일보사와 네 분 심사위원 선생님께 마음을 다해 큰절을 올립니다. 또박또박 앞으로 나가보겠습니다.

◆권규미

권규미

권규미

경북 경주 출생. 중앙시조백일장 2022년 5월, 23년 4월 장원.

중앙신춘시조상 심사평

잘 발효된 시어로 잠 든 역사 깨워

또 한 명의 패기 있는 신인 탄생을 기대하며 심사위원들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예비 시인들이 보내온 90여 편의 작품을 숙독했다. 네 명의 심사위원이 각각 다섯 편의 작품을 골라낸 다음 심사위원 모두 이견이 없는 작품은 권규미의 ‘조문국을 다녀오다’였다. 조문국은 삼한시대 초기 부족국가로 경상북도 의성군에 위치했던 소국이다. ‘조문국을 다녀오다’는 세 수로 쓴 연시조로 잊혀진 역사에 대한 깊은 사유를 잘 발효된 시어로 섬세하고 애틋하게 그려낸 가품이었다. 오래전 사라진 사기(史記) 속의 작은 부족을 현재로 호명하여 깊은 잠에 든 역사를 깨워 시조의 정형 미학에 오롯하게 담아냈다.

같이 보내온 비파형동검 역시 역동성 넘치는 활달한 발화법이 선자의 눈길을 오래 머물게 했다. 신인 탄생을 뜨겁게 축하하며 ‘앙간비금도’ ‘시간의 지문’ ‘소리의 영역’ ‘디지털 사무실에 걸린 아날로그시계’ ‘불(不)’도 더불어 논의되었음을 밝힌다. 응모자 모두 내년에 더 좋은 작품으로 다시 도전해 주시길 바란다.

◆심사위원=강현덕·서숙희·손영희·정혜숙(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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