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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장혁의 시선

판사가 예뻐서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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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장혁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임장혁 사회부장·변호사

임장혁 사회부장·변호사

2018년 6월 즈음의 일이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인사차 찾아온 어떤 변호사에게 ‘양승태 코트(court)’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국정농단’ 특검팀에 윤 지검장과 함께 몸담았던 이 변호사는 “법원에 칼을 대는 건 신중하셔야 한다”는 취지로 만류했지만, 윤 지검장은 “자기들이 수사를 해달라고 저러는데 어떡하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윤 지검장의 말은 이 면담 전후 사태 전개를 떠올리면 이해된다. “법원 자체 해결이 원칙”이라던 김명수 대법원장은 그 달 15일 “이미 이뤄진 고발에 따라 수사가 진행될 경우 미공개 문건을 포함해 (법원) 특별조사단이 확보한 모든 인적·물적 조사자료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공하고, 사법행정의 영역에서 필요한 협조를 마다하지 않겠다”며 입장을 표변했다. 윤 지검장은 나흘 뒤 수사를 특수1부에 맡겼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법원행정처는 내부 문건 다수를 검찰에 내줬다.

재판 적체 해결책은 법관 증원뿐
여 몽니와 야 피해망상으로 막혀
정부·여당과 민주당의 공동 책임

판도라의 상자는 그렇게 열렸다. 그 결과, 상고심 적체를 상고법원이라는 우회로를 뚫어 해결하려던 양승태 코트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모두 직권남용죄의 범죄사실로 기록돼 재판에 넘겨졌다.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됐고 14명의 판사가 기소됐다. 66명의 전·현직 법관이 증인석에 앉아야 했다.

수사와 기소가 만든 ‘사상 최초’ 기록도 여럿이지만, 양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1심 재판은 또다른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됐다. ‘사법 동맥경화’ 증상의 표본이 된 것이다. 양 대법원장은 4년 7개월간 290번의 재판, 임 전 차장은 5년간 247번의 재판 끝에 각각 징역 7년형을 구형받았다. 대법원의 결론이 날 무렵 이 재판의 러닝타임은 10년을 족히 넘길 것이다.

재판의 재앙적 장기화는 분명 ‘김명수 코트’의 유산이다. 검찰이 전임자의 사법 행정 전반을 ‘범죄’로 낙인찍자 화들짝 놀라 ‘양승태의 길’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내달린 결과는 상고심 적체의 심화와 하급심 마비였다.

지난 4일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과 대한변협이 개최한 ‘재판 장기화와 그 해법’ 학술대회에선 김명수 코트의 여러 조치가 재앙의 원인으로 거론됐다. 법원을 경쟁의 무풍지대로 만든 고등부장 승진제 폐지, 행정처 심의관 감축과 법원장 후보 추천제 등이 가져온 사법행정의 소극화, 적정 선고 건수를 근거없이 낮춘 ‘3·3·3·0’(3주간 주당 3건씩 선고하고 한 주는 쉬는 업무 행태) 체계의 도입 등이다. 여기에 ▶사건의 복잡화 ▶법관의 고령화 ▶소송전의 격화 등이 맞물리면서 ‘10년째 재판 중’인 사건은 이제 예사다.

재판 장기화의 폐단은 가늠조차 어렵다. 범죄피해자의 회복은 요원해지고, 재산권 등 개인의 권리는 무한 침식된다. 사회 갈등이 증폭되고 기업활동이 마비될 수도 있다. 국민 상당수는 피고인들 중에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아야할지 고민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다음 대법원장도 사법부를 ‘김명수 이전’으로 되돌리긴 어렵다는 데 있다. ‘워라밸’에 젖은 판사들은 더 이상 보상없는 노동에 몸을 갈아넣을 생각이 없다. 다시 인사고과에 신경쓰며 승진 경쟁에 매달릴 마음도 없다. 학술대회 발표자인 전휴재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는 심리계획 수립 의무화를 대안으로 내놨다. 재판부가 재판을 몇 번 열어 언제쯤 선고할지 미리 정하면 재판이 늘어져도 당사자들이 불만을 감내할 거라는 주장이다. 과연 당사자의 변덕과 돌출행동이 속출하고 다양한 소송기술이 구사되는 현장에서 이 계획이 얼마나 지켜질 수 있을까. 대안보다 쉽게 공감되는 건 전 교수가 붙인 전제다. “속도 지연은 법관 대폭 증원이 없다면 불가피하다.”

판사가 예뻐서가 아니다.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27조 3항)이 낡은 장식으로 전락하지 않을 유일한 길이 법관 증원 뿐이라면 법관을 늘려야 한다. 하지만 검사 220명, 판사 370명을 늘리자는 검·판사정원법 개정안은 지난해 12월부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소위에 버려져 있다. “검사 증원 없이 법관 증원 없다”는 정부·여당의 비논리와 “검사는 못 늘린다”는 야당의 피해망상이 맞물린 결과다. 재판 장기화가 당 대표 포함 다수 의원의 이익에 부합하게 된 민주당도 법관을 늘리기 싫은 게 속내일 수 있다. 검찰과 민주당의 집단 이기주의가 국민의 기본권을 좀먹고 있다.

검찰이 인력난을 느끼는 이유와 법관이 부족한 원인은 다르고 문제의 시급성에선 더 큰 차이가 있다. 판사부터 늘려야 한다.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대통령을 따르는 정부·여당과 김명수 코트를 만들어냈던 민주당이 져야할 최소한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