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하야 고민할 시간에 나라 장래 걱정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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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무회의는 국가의 현안을 정책으로 최종 마무리 짓는 자리다. 그곳에서 대통령은 어제 하야 가능성을 얘기했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기는커녕 국민을 불안으로 내몰았다. 희망에 부풀어야 할 아침 식탁에서 '가출'을 얘기하는 가장과 같다. 할 말을 잊고 있는 국민의 멍한 얼굴이 안쓰럽다.

대통령의 '하야 가능 증후군'은 처음이 아니다. 취임 석 달 만에 "대통령직을 못 해 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했다. 석 달 동안 고생을 하면 얼마나 했고 위기가 있었으면 얼마나 있었다고 이런 얘기를 했다. 다섯 달 후인 2003년 10월, 대통령은 진짜 그만둘 수도 있다고 했다. 국회가 행자부 장관을 해임결의하고 감사원장 임명을 부결시키자 재신임 국민투표를 거론했다. 이는 헌법에도 없는 것이었다. 지난해 한나라당에 대연정(大聯政)을 제안하면서는 "권력을 통째로 내놓으라면 검토하겠다"고 했다. "2선후퇴나 임기단축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봤다"는 말도 나왔다.

말에 일관성이라도 있었으면 국민은 차라리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지 모른다. 대통령은 국민의 눈앞에 지그재그를 그려놓았다. "정부는 무너지지 않는다. 대통령에서 하야하지 않는다" "재주가 모자라도, 성질이 더러워도, 마음에 안 들어도 대통령은 대통령이다" "국정의 끈을 놓지 않겠다"…. 대통령이 하야를 얘기할 때 국민은 가슴이 철렁했고 대통령이 "잘해보겠다"고 할 때 국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3년9개월이 흘러갔다.

그 대통령이 어제 또 하야 문제를 언급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데다 대통령의 심리 위축이 어느 때보다도 심해 이번 발언은 더 신경이 쓰인다. 대통령의 언어에서는 패배감.불안과 자신감 상실이 짙게 묻어 나온다. 대통령은 "굴복했다"고 했다. 인사라는 게 잘못하면 철회하고 다시 잘하면 되는 것인데 대통령은 굳이 굴복이라고 묘사했다. "인사권이 사사건건 시비가 걸려 대통령의 권한행사가 대단히 어렵다"고도 했다. 인사를 제대로 하면 될 텐데 그 쉬운 길은 외면해 왔다. 그 역풍을 맞자 대통령은 불평을 하는 것이다. 적잖은 이들이 "대통령이 우울증에라도 걸린 것 아닌가. 정말 하야하는 것 아닌가"라고 또 걱정한다.

일부는 "하야하면 헌법에 따라 다시 뽑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야는 피해야 한다. 노 대통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다. 대통령이 그런 식으로 물러난다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후퇴할지 모른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중도 퇴장론이 쉽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제도의 불안을 가져오는 것이다. 여야는 대선 채비를 갖추지 못했다. 혼란기에 북한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대한민국은 '노무현'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필요해서 하야를 피해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근거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 냉정하고 차분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헌법을 펴고 취임선서를 다시 읽어보라.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대통령직은 권리요 선택이 아니라 죽음과 바꿀 각오를 해야 하는 의무다. 각오를 새로이 한 다음 대통령은 "앞으로 1년을 잘하면 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대통령은 자신을 바꿔야 한다. 통일부 장관 후보와 KBS 사장이 왜 문제인지 비판의 목소리를 차분히 들어보라. 전효숙은 결국 잘못이기 때문에 바뀐 것이다.

총리도 바꾸고 내각도 중립.거국적으로 새로 짜면 국정 화합의 단초가 생길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에도 참신한 색깔을 입혀 보라. 생각이 다른 이들을 관저로 불러 밤 늦도록 대화를 나눠 보라. 대통령은 '노무현'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적(的) 쇄신을 해야 한다. 이런 쇄신이 이뤄지면 여당은 물론 야당도 협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야당이 돕는 대통령은 불법 시위대도 무시 못한다. 북한도 다시 볼 것이다. 초라한 모습으로 봉하마을로 내려가기 전에, 노 대통령에겐 마지막 기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