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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안 끝나는 재판…머리 맞댄 판사·변호사 내놓은 답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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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사 출신인 A 변호사는 10년 넘게 진행 중인 한 민사 사건을 맡고 있다. 1심 판결이 나오는 데 4년, 2심은 7개월,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이 나오는 데는 4년 6개월이 걸렸다. 파기환송심은 1년 넘게 진행 중이다. A 변호사는 “이미 10여 년이 지난 상태다 보니 추가 증거를 찾기도 어렵고, 관련자들도 상당 부분 다른 곳으로 떠난 상태라 파기환송심 판결 선고 및 확정까지는 여전히 몇 년이 걸릴지 예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 B 고등법원 판사도 소 제기 후 8년이 지난 민사 사건 파기환송심을 들여다보고 있다. B 판사는 “이 사건은 적절한 사건관리가 없었고, 감정으로 사건 심리가 지체되었던 것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전휴재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지난 6월, 대법원 법원행정처의 연구용역을 받아 수행한 ‘신속한 민사재판을 위한 패스트 트랙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실린 법조인 설문 결과다.

4일 사법정책연구원(사정연)과 대한변호사협회가 공동 개최한 학술대회 ‘재판 장기화와 그 해법’ 발표를 맡은 전 교수는 이 연구를 소개하면서 “우리나라 재판의 속도는 더 이상 신속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단계”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민사본안 1심 합의부 사건 평균처리 기간은 2013년 245.3일에서 지난해 420.1일로, 같은 기간 형사재판 불구속 1심 합의부 사건 평균처리 기간은 151.8일에서 223.7일로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민·형사 두 사건 모두에서 접수 및 처리 건수는 줄어들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박형남 사법정책연구원장이 4일 열린 '재판 장기화와 그 해법' 학술대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 사법정책연구원

박형남 사법정책연구원장이 4일 열린 '재판 장기화와 그 해법' 학술대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 사법정책연구원

재판이 길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영창 사정연 선임연구위원(고등법원 판사)은 일단 복잡한 사건이 많아지면서 판사가 봐야 할 자료·기록도 늘었다는 점을 꼽았다. 지난해 사정연에서 중앙지법 일부 재판부를 표본 조사한 결과 사건당 평균 기록 면수가 2014년 176.6면에서 2019년 377면으로 약 2배 증가했다. 이 위원은 또 “변호사 수의 증가와 수임 사건 감소는 (재판에) 공격적으로 임하게 함으로써 신속한 재판의 측면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며 “반면 법관 증원은 미미하다”고 했다.

남아있던 판사들 역시 고령화로 인해 업무 능률이 낮아지고 있다고 했다. 판사들의 평균 연령은 2013년 39.8세에서 지난해 44.2세까지 올라갔다. 이 위원은 “나이 든 법관 상당수가 단독 판사, 대등 합의부 주심 판사로서 과거 주로 젊은 법관들이 담당했던 업무들을 직접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이외에도 잦은 인사이동, 고등부장 승진제 폐지, 적정 선고 건수 하향, 사법행정권의 소극적 행사, 서면 수시 제출 관행 등도 원인으로 지목했다.

“법관 대폭 증원 없으면 지연 불가피”

이영창 사정연 선임연구위원과 전휴재 성균관대 법전원 교수가 이날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 사법정책연구원

이영창 사정연 선임연구위원과 전휴재 성균관대 법전원 교수가 이날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 사법정책연구원

“속도 지연은 법관의 대폭 증원이 없다면 불가피하다”고 한 전 교수는 “처리속도 지연을 예측 가능성 확보로 상쇄할 수 있다. 심리계획 수립을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민사소송법을 개정할 것을 제안한다”고 했다. 사건 초기에 재판부가 언제쯤 선고를 하고 몇 번 재판을 열지 등을 정하면, 재판이 늦어지더라도 당사자들의 불만이 적을 거라는 주장이다. 전 교수는 당사자들이 동의할 경우 정해진 기간 내에 재판을 빠르게 끝내는 ‘신속절차’ 도입과 민사사건 2심에서 항소이유서 제출 의무화 등 항소심 절차 개선 등도 함께 제안했다.

이 위원은 인사제도 개편과 인공지능(AI)을 이용한 업무 효율화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한 법원에 판사가 오래 근무하면서 비슷한 사건을 맡게 해 전문성을 쌓게 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위원은 “권역별 법관 선발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1 법원 1 사무분담 원칙에 따라 사무분담을 최소화해 업무 수행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전체의 10% 정도 되는 어렵고 복잡한 사건을 제외한 정형적이고 반복된 사건은 (AI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쉽게 판결문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위원은 논란이 됐던 3·3·3·0(판사들이 3주간 세 건씩 선고하고, 한 주는 쉬는 업무행태)에 대해서 “기준을 알 수 없고 일견 불합리하다. 그렇다고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지속 가능성이 없고, 유능한 법조 인재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것”이라며 “판사들의 업무 강도를 측정할 객관적 통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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