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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인데, 학교 대신 게임학원 간다…"제2 의 페이커 될래요"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9일 오후 오산대 e스포츠과 학생들이 경기 실습실에서 올해 롤드컵 8강 경기를 시청하고 있다. 송다정 인턴기자

지난달 29일 오후 오산대 e스포츠과 학생들이 경기 실습실에서 올해 롤드컵 8강 경기를 시청하고 있다. 송다정 인턴기자

“페이커는 왜 여기서 이런 플레이를 했다고 생각해? 같은 상황에서 너라면 어떤 전략으로 플레이했겠니?”

지난달 29일 오후 오산대 e스포츠과 경기 실습실에선 교수와 학생 30여명이 모여 ‘2023 리그오브레전드(LOL·롤) 월드챔피언십’(롤드컵) 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한상용 e스포츠과 교수는 학생들에게 “경기 흐름과 게임에 사용된 챔피언(캐릭터)을 분석해 설명해봐라”, “왜 이 캐릭터 말고 다른 캐릭터를 사용했다고 생각하나” 등을 물었다. 한 교수는 “게임은 변화가 정말 빠르기 때문에 학생과 교수가 서로 생각하는 최고의 전략을 공유하며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고 했다.

대학 게임 학과 수 97개, 4년만에 1.5배 늘어

‘제2의 페이커’를 꿈꾸는 학생들이 대학으로 모이고 있다. 5~6년 전만 해도 주로 중·고교 시절 취미로 게임을 하다 프로 선수로 발탁되는 시스템이었다면, 이제는 대학에 진학해 게임을 전공하는 학생이 늘고 있다. 학생들은 졸업 후 프로게이머가 되거나 e스포츠 관련 산업으로 진출한다. 업계에선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e스포츠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고, 올해 롤드컵에서 ‘페이커’ 이상혁 선수가 이끄는 T1 팀이 우승하는 등 국내 e스포츠 인기가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대학들도 발 빠르게 게임 전공을 개설하며 학생들을 모집하고 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게임 관련 일반·전문대 개설 학과 수는 2019년 66개에서 2023년 97개로 4년 만에 30개가 늘었다. 입학 경쟁도 치열하다. 올해 오산대 e스포츠과 수시 모집은 71명 모집에 635명이 지원(8.9대 1)했다. 상명대 게임전공(23.4대 1), 한국공학대 게임공학과(14.3대 1) 등도 경쟁률이 높다. 게임 회사와 연계해 졸업 후 바로 취업이 가능한 가천대 게임·영상학과는 38명 모집에 570명(15대 1)이 지원했다.

수업은 게임 실습…“롤 레벨 30 이상이어야”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3 리그 오브 레전드(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결승전 T1과 웨이보 게이밍의 경기에서 3-0으로 승리한 T1 페이커(이상혁) 선수가 우승컵을 들어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3 리그 오브 레전드(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결승전 T1과 웨이보 게이밍의 경기에서 3-0으로 승리한 T1 페이커(이상혁) 선수가 우승컵을 들어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게임학과는 크게 프로게이머를 양성하는 트랙과 심판·코치·데이터분석가 등 지원 인력을 키우는 트랙, 게임 기획·공학·그래픽 전문가를 길러내는 트랙 등으로 나뉜다. 게임도 롤 뿐만 발로란트, 배틀그라운드 등 e스포츠에서 유명한 게임들을 다양하게 배운다. 학생이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진로를 택하는데, 프로게이머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게임을 할 줄은 알아야 한다. 한상용 교수는 “예를 들어 롤의 경우, 아예 게임을 안 해본 학생에게도 레벨 30까지는 4~5주차 내로 달성하라고 한다”며 “그 후 수업 시간에 실력에 맞춰 1:1 토너먼트나 5:5 팀 게임을 진행해 프로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도록 한다”고 했다. 1학년 이수빈씨는 “e스포츠 분야 전문 심판을 꿈꾸고 있는데, 대학에 와서 게임의 이론적인 측면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배웠고 실습도 자주 해서 도움이 많이 된다”고 했다.

“학교 대신 게임 학원으로”…대학원 e스포츠 연구도 인기

지난달 28일 수원시의 A게임학원에서 고3 김상현(18)군이 롤을 하고 있다. 학원 교사가 옆에서 김군의 플레이를 분석하고 있다. 송다정 인턴기자

지난달 28일 수원시의 A게임학원에서 고3 김상현(18)군이 롤을 하고 있다. 학원 교사가 옆에서 김군의 플레이를 분석하고 있다. 송다정 인턴기자

대학 진학을 위한 중·고교생 대상 게임 입시 학원도 인기다. 프로게이머,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 등 각 분야에 맞는 수업이 있고, 아마추어 대회 입상 등 학생부에 들어갈 내용도 챙겨준다. 지난달 28일 경기도 수원시의 A 게임학원에서 만난 고3 김상현(18)군은 학원 교사의 코치를 받으며 롤을 하고 있었다. 올해 e스포츠학과 수시에 지원한 김군은 “가정학습을 신청해 등교하지 않고 학원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며 “게임이 끝나면 코치님이 실수한 부분과 다른 전략 선택지 등을 알려준다”고 했다.

A게임학원의 석경환 코치(학원 교사)는 “취미반이 아니라 게임학과 대입 준비를 위해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이 많이 늘었다”고 했다. 올해 해당 학원 전체 수강생 150명 중 입시를 준비하는 고3 학생은 20여명이 넘는다. 석 코치는 “고3을 제외하고도 중·고교 수강생 중 3분의 1 이상이 게임학과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올해 e스포츠학과에 입학한 자녀를 둔 서모(48)씨는 “어릴 땐 아이가 게임에만 몰두해 혼도 내보고, 못하게 하려고 컴퓨터를 고장 내기도 했었다”며 “하지만 결국 아이의 선택과 적성을 존중하기로 했고, 대학 진학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많이 기쁘고 대견했다”고 했다.

학부 뿐 아니라 대학원에서도 e스포츠 관련 연구가 인기다. 2021년 연세대 컴퓨터과학과에 만들어진 ‘연세e스포츠 연구실’은 프로게이머들의 성능·행동 분석을 통해 게임을 더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병주 연세대 컴퓨터학과 교수는 “지난해와 비교해 올해 연구실 진학을 문의하는 학생 수가 부쩍 늘었다”며 “e스포츠를 유망한 산업이자 흥미로운 연구 테마로 바라보는 학생들이 늘어난 것”이라고 했다.

“e스포츠, K팝 만큼 발전할 수 있어”

지난 8월 9~10일 오산대에서 진행된 고등학생 대상 e스포츠학과 하계 캠프에서 고등학생들이 5대 5 롤게임을 하며 한상용 교수의 코치를 받고 있다. 사진 오산대

지난 8월 9~10일 오산대에서 진행된 고등학생 대상 e스포츠학과 하계 캠프에서 고등학생들이 5대 5 롤게임을 하며 한상용 교수의 코치를 받고 있다. 사진 오산대

업계 전문가들은 국내 게임 산업이 ‘K팝’ 만큼의 발전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2 e스포츠 실태 조사 자료에 따르면 국내 e스포츠 산업 규모는 2015년 772억9000만원에서 2021년 1048억3000만원으로 1.4배 늘었다. 국내 대회의 상금 규모도 2018년 대회당 평균 7700만원에서 2021년 평균 1억8300만원으로 두 배 이상 커졌다. 김성락 오산대 e스포츠과 학과장은 “지금 학부모가 되는 30~40대는 게임에 친숙한 세대이기 때문에 앞으로 점점 더 게임도 긍정적인 이미지로 성장하고, 투자도 많이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핑크빛 전망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 회장(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우리나라는 선수가 강하다는 특징이 있지만, 중국에서 스카웃 해버리면 끝나는 구조로 기초가 약한 편이기도 하다”며 “선수 양성 뿐 아니라 코치, 감독, 게임 개발 등 e스포츠의 제반 생태계를 위한 정책적 지원과 교육도 필요하다”고 했다.

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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