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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봉렬의 공간과 공감

근대건축의 교과서, 빌라 사보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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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는 모더니즘 건축 최고의 대가이자 완성자다. 근현대 세계의 모든 도시와 건축은 그의 영향력 아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고, 콘크리트와 아파트로 뒤덮인 서울의 현재도 그가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제시한 사상가이며 근대건축의 핵심 원리를 규명한 이론가이기도 했다.

1928년 피에르와 외제니 사보아 부부는 파리 근교 푸아시에 주말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전기와 가스, 중앙난방과 온수가 공급되는 당시 첨단 주택을 의뢰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10여년간 연구했던 이른바 ‘근대건축의 5요소’를 적용해 1931년 완벽히 새로운 주택을 완성했다. ①필로티 구조로 건물을 지상에서 들어 올려 정원을 확장했다. ②기둥과 벽체를 분리해 내부공간을 자유롭게 설계했다. ③일조와 환경조건에 맞추어 건물 4면의 입면도 모두 다르다. ④옆으로 긴 창을 내 주변의 파노라마 숲 조망을 실내로 끌어들였다. ⑤옥상에 테라스 정원을 만들어 또 다른 자연을 창조했다.

공간과 공감

공간과 공감

거실과 중정 사이에 큰 유리창을 두어 내외부를 하나로 통합해 공간을 시각적으로 확장했다. 직선 경사로와 곡선 계단을 나란히 두어 3개층을 순환하는 동선을 구성했다. 실내와 실외, 평면과 곡면, 막힘과 뚫림이 교차하는 이 ‘건축적 산책로’는 이론을 넘어서는 순수한 감동과 경이의 공간이다.

그러나 완공 직후부터 사보아 부부는 비가 새고 벽이 갈라지는 부실에 시달렸고 난방 효과도 거의 없어 화창한 날에만 겨우 방문했다. 2차대전 기간 독일군과 미군에 징발되었고 전후에는 창고로 전락했다가 정부가 매입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관리하고 있다. 애초 공사비의 2배를 소요했으나 거의 사용하지 못했으니 건축주로서는 실패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주택은 생활을 위한 기계”라고 주장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적 선언은 아이러니하게 성공했다. 혁명가의 희생으로 혁명을 완수하듯이.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