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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에서 110번째 영화 만들까…김수용 감독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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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용 감독이 3일 별세했다. 94세. 중앙포토

김수용 감독이 3일 별세했다. 94세. 중앙포토

한 마디로 충무로의 신사, 인격 있는 예술가였다. 술을 많이 드셨지만 주정하는 법이 없었고, 책을 좋아하셨다.

3일 별세한 김수용 감독에 대한 정지영(77) 감독의 회고다. 김수용 감독 연출부로 충무로에 들어간 정 감독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평소에 ‘영화감독은 경험이 많아야 하는데 우리가 몸이 하나이니 경험을 많이 할 수 없잖니, 책을 통해 간접 체험해야지’라고 말씀하셨다”라고도 돌아봤다.

'안개'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0년대 한국영화 이끌어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를 비롯해 109편의 영화를 남긴 김수용 감독이 3일 오전 1시 50분쯤 요양 중이던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94세.

흑백 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중앙포토

흑백 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중앙포토

1929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안성 공립농업학교(국립한경대의 전신) 재학 중 해방을 맞자 같은 반 김세중(조각가)과 3ㆍ1운동을 다룬 연극 ‘대지의 노을’을 무대에 올렸다. 1951년 육군 소위로 임관, 국방부 정훈국에서 선우휘(1922~86)의 지휘로 군인 교육용 영화를 만들었다. 감독 데뷔작은 ‘공처가’(1958), 군인 시절 주말마다 시간 내서 연출했다. 딸의 혼사를 앞두고 가정불화를 겪던 곰탕집 주인에 대한 코미디다.
껌팔이ㆍ구두닦이를 하며 동생들을 돌본 소년 가장 이윤복의 일기를 스크린에 옮긴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서울에서만 28만 5000여명이 관람하며 흑백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고, 대만에도 수출됐다.

오영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갯마을'(1965). 오른쪽이 주연 고은아.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오영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갯마을'(1965). 오른쪽이 주연 고은아.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고인은 오영수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갯마을’(1966),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원작인 ‘안개’(1967), 차범석의 희곡을 영화로 만든 ‘산불’(1967) 등으로 1960년대 문예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현진건의 ‘무영탑’, 이효석의 ‘분녀’, 박경리의 ‘토지’ 등 문학을 원작으로 한 영화만 50편이 넘는다. 문학성 짙은 원작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팍팍한 시대의 긴장을 이겨냈다. 당대 트로이카였던 남정희ㆍ문희ㆍ윤정희를 비롯해 신성일ㆍ엄앵란ㆍ신영균ㆍ고은아ㆍ김지미 등 톱스타, 신상옥ㆍ유현목ㆍ김기영 감독과 함께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영화 '어느 여배우의 고백'에서 남정임(왼쪽)과 연습하는 김수용 감독. 중앙포토

영화 '어느 여배우의 고백'에서 남정임(왼쪽)과 연습하는 김수용 감독. 중앙포토

60년대 한국 사회의 어둡고 권태로운 풍경을 세련된 감수성으로 담아낸 ‘안개’는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배우 윤정희(1944~2023) 추모전의 하나로 상영됐다. 가수 정훈희 씨가 17살 때 부른 동명의 주제가는 55년 만에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2022)에도 쓰이며 재조명됐다.

윤정희ㆍ신성일 주연의 '안개'(1967)는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윤정희ㆍ신성일 주연의 '안개'(1967)는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고인은 중광 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중광의 허튼소리'(1987)가 10여 군데 잘려나가는 검열 파동을 겪으면서 항의 표시로 잠정 은퇴했다. 이후 일본 자본으로 만든 '사랑의 묵시록'(1995), 저예산 영화 '침향'(1999) 등을 연출했다. 총 109편으로, 고영남 감독(111편)에 이은 다작으로 꼽힌다.
청룡영화상(1965), 부일영화상(1966), 백상예술대상(1966ㆍ1979), 아시아태평양영화제(1967) 등에서 감독상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특별공로상(2009) 등을 수상했다. 1980년대부터는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며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을 지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영화는 이미 있었다.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도 영화는 계속될 것이다.”
생전에 남긴 말처럼, 저 하늘에서 110번째 영화를 연출할 것 같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장남 김석화 씨, 정지영ㆍ이장호 감독과 배우 안성기ㆍ장미희 씨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 발인은 5일 오후 1시, 장지는 서울추모공원(1차), 모란공원(2차)이다. 02-207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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