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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숨은그림찾기

폐허가 된 도시에도 낭만은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차장대우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차장대우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도시, 땟국에 절은 얼굴로 허겁지겁 국수를 입에 넣는 전쟁고아…. 1950년대 찍은 흑백 사진이라 하면 흔히 떠올릴 이미지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 정전협정 5년 후인 1958년 명동에서 찍었다 하면 믿어지시나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소녀가 비슷한 차림을 한 양장점 마네킹을 쳐다봅니다.

한영수(1933~99)의 사진은 우리가 1950년대 서울에 대해 갖고 있는 상투적 인상을 보기 좋게 배신합니다. 서부 영화를 내건 극장 앞에는 멋 부린 남녀가 삼삼오오 모여 있고, 길 가는 여자들의 흰 양산과 원피스에는 여름 햇살이 찬란하게 부서져 내립니다. 살아남는 게 최선이었던 시절로 기억되고 기록되는데, 한영수의 사진 속 사람들은 다릅니다.

한영수, 서울 명동 1958. [사진 한영수문화재단]

한영수, 서울 명동 1958. [사진 한영수문화재단]

어쩌면 그래서 외면받았을 그의 사진들이 요사이 재발견되고 있습니다. 1950~60년대 서울을 담은 그의 흑백사진 20점이 석 달 전 미국 LA카운티 미술관에 소장됐습니다. 서울사진축제(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아예 1950년대 명동 거리를 지도로 재현하고 한영수를 비롯한 당대 모더니스트들의 사진을 내걸었습니다.

젊은 관객들의 열광도 남다릅니다. 딸인 한선정 한영수문화재단 대표는 “그들에게는 당시의 서울이 살아보지 않은 시대이자 상상의 도시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시절 유년을 보낸 이들조차 사진을 보고는 “잊었던 과거를 되찾았다”고 하니, 한영수의 사진에 무슨 힘이 있는 걸까요.

살이 나간 우산을 쓴 채 문득, 쇼윈도를 선망의 눈길로 쳐다보던 저 어린 소녀는 지금 어디 있을까요. 살아 있다면, 어떤 할머니가 돼 있을까요. 저 마네킹처럼 고운 옷 입고 젊은 날을 보냈을까요, 아니면 억척스럽게 세월을 견뎠을까요. 어느 쪽이든 우리네 삶 또한 한쪽 면만으로 볼 수는 없겠다 싶습니다.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