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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 미·나토 ‘에이블 아처’ 훈련 과대평가 전쟁 공포 조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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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호 29면

[제3전선, 정보전쟁] KGB의 핵전쟁 조기 경보 ‘라이언 작전’ 〈하〉

1983년 에이블 아처 훈련 당시 실전을 방불케 하는 나토 연합군의 전차 기동훈련(서독 스톡하우젠). [사진 미국국가안보문서보관소]

1983년 에이블 아처 훈련 당시 실전을 방불케 하는 나토 연합군의 전차 기동훈련(서독 스톡하우젠). [사진 미국국가안보문서보관소]

1983년 11월 2일 미국이 나토 회원국과 함께 ‘에이블 아처(Able Acher)’ 연례 연합훈련을 시작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소련이 전투 대응 태세에 돌입했다. 미국이 훈련을 위장해 선제 핵 공격을 할 수 있다고 의심한 소련이 군 전체에 비상을 선포하고 장병들에게 전시태세를 명령했다. 이뿐만 아니라 핵무기를 탑재한 전폭기가 출격대기하고 중거리 핵미사일 SS-20을 유사시 발사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또한 미군의 B-52 폭격기가 서독에서 이륙하는 것을 상정한 대공미사일 사격 훈련도 실시했다. 언제 핵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일촉즉발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 같은 사실은 소련 붕괴 후 영국과 동독 정보기관의 기밀문서가 해제되면서 밝혀졌다.

1983년 핵전쟁 위기는 〈상〉편에서 설명한 9월 위기에 이어 11월 또 한번 우리 모르게 우리 곁을 지나갔다. 특히 11월 위기는 소련이 나토의 연합훈련을 핵전쟁 준비단계라고 과도하게 의심하여 실제 군사력을 움직였다는 점에서 공포스러운 기억이다. 여기에는 라이언 작전(Operation RYaN)도 한몫했다. 대미 조기경보를 위해 야심차게 추진한 KGB의 라이언 작전이 당시의 정세 악화 분위기와 맞물려 위기를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83년 9월 소련의 KAL기 격추도 영향 줘

무엇보다 그해 에이블 아처 훈련 내용이 KGB를 긴장시켰다. 예년과 달리 대규모 기동훈련에 이어 핵전쟁 훈련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KGB는 전(全) 해외 거점에 미국의 핵공격 징후를 빠짐없이 보고하도록 강조했다. 그런데 보고된 첩보를 라이언 지표(RYaN Indicators)에 따라 분석해 보니 영락없는 전쟁 준비 신호처럼 보였다. 미국의 주력 대형 수송기인 C-5A와 C-141가 1만6000명의 대규모 병력을 서유럽으로 이동시키고, 전쟁 시 장병들에게 지급될 화생방 장비도 실제로 나누어 주었다. 나토 연합훈련 최초로 B-52 폭격기도 동원되었다. 서독에서는 실전을 방불케하는 대규모 전차 기동훈련이 실시됐다.

소련을 더욱 긴장시킨 것은 핵무기 전술훈련이었다. 핵무기 배치에 관한 훈련 명령에 이어 최초의 핵무기 투하절차 훈련, 핵무기의 실전배치로 오해를 살 만큼의 통신량 급증과 군사암호의 변경 등 소련의 의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KGB는 에이블 아처훈련이 기습공격을 숨기기 위한 기만작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1941년 방심하다가 독일로부터 기습공격을 당한 역사적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미국이 공격 단추를 누르는 순간 언제든 맞대응할 수 있도록 최고의 경계수준인 헤어트리거(Hair Trigger) 상태를 유지했다. 요컨대 1983년 11월 위기는 KGB가 나토 군사훈련을 라이언 지표에 따라 평가한 결과, 전쟁 준비 신호로 과대평가한 탓이 컸다.

그러나 KGB의 과대평가는 전적으로 라이언 지표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정세 악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의 정세는 미·소간 군사·외교적 긴장과 지도자 간 불신이 정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줄곧 소련이 우려한 퍼싱2 미사일의 서유럽 전진 배치를 재확인했다. 퍼싱2 미사일이 서독에서 발사될 경우 10분 안에 소련에 도착하기 때문에 소련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에 유리 안드로포프 공산당 서기장은 1983년 1월 4일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의에서 미국의 퍼싱2 미사일 전진 배치는 소련과 동유럽에 대한 가장 심각하고 현실적인 위협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정보전쟁

정보전쟁

그해 3월 8일 레이건 대통령의 전미(全美) 복음주의 교회연합 연설은 미국의 핵공격 가능성을 의심하던 소련 지도부에 기름을 부었다. 이 연설에서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비판한 뒤, 소련을 겨냥한 핵무기 증강 정책에 대해 교회지도자들의 지지를 요청했다. 이쯤되자 소련에서는 미국의 선제 핵공격 가능성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이런 소련 지도부의 인식은 KGB의 해외거점에 하달되어 고스란히 정보활동에 반영되었다. KGB의 해외 거점이 미국의 핵전쟁 징후로 볼 수 있는 사소한 사안까지 보고하면서 오히려 핵전쟁 위기를 상승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았다.

1983년 9월 1일 소련의 대한항공 007기 격추사건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미국과 나토는 소련의 민간여객기 공격을 보면서 소련 지도부의 내부 통제능력을 심각하게 의심했다. 나아가 소련 지도부의 통제력 허술로 언제 어떤 형태의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그해 에이블 아처 훈련은 재래전, 화학전, 핵전쟁 등 발생 가능한 모든 전쟁 형태를 실험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전쟁의 마무리도 소련에 대한 핵 공격으로 끝맺는 시나리오를 선택했다. KGB는 이 점을 오해해 과잉대응했다.

이처럼 에이블 아처훈련 초기 3~4일간은 악화된 정세 속에서 정보판단 오류와 지도자의 편견 등이 맞물려 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러나 훈련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핵전쟁의 먹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토본부에 침투한 KGB 스파이가 나토 지휘부의 전시 벙커가 개방되지 않는 등 전쟁 징후가 없다고 수차례 후속 정보를 올렸다. 미국내 KGB 스파이들도 ‘292개 전쟁징후 지표(the 292 Indicators)’ 중 군사지표를 제외한 정치, 정보, 경제, 민방위 지표는 전쟁 준비라고 볼 만한 징후가 없다고 보고했다. 소련 내부에서도 신중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은 나토운영의 2중 구조상 미국의 일방적 핵무기 사용은 불가능하다고 설득했다. 이와 같은 균형추 역할로 인해 핵전쟁 공포는 더 이상 고조되지 않았다.

KGB 292개 지표, 북핵 관리에 참고할 만

1983년 11월의 전쟁 공포는 당시 극도로 악화된 정세와 이 같은 정세 악화의 분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라이언 작전의 내재적 한계에 기인한 탓이 크다. 정보는 선입견과 정세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듣고 본 그대로를 수집하여 판단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정세환경에 따라 정보의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지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정세와 정보를 분리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라이언 작전은 이를 잘 보여 주었다.

미국 정보당국도 오판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11월 위기에 대해, 소련이 전쟁 공포를 조장해 국제사회에 대미 불신을 확산시키고 이를 통해 소련의 평화 공세를 강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평가했다. 소련이 미국의 핵전력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경계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소련 정보당국이 미국의 핵 위협을 과대평가했다면, 미국 정보당국은 소련의 우려를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했다.

미국의 핵 공격 조기경보를 한 KGB의 라이언 작전에 동독 정보기관도 공동 참여한다는 내용의 동독 슈타지 명령 85-1호. [사진 미국국가안보문서보관소]

미국의 핵 공격 조기경보를 한 KGB의 라이언 작전에 동독 정보기관도 공동 참여한다는 내용의 동독 슈타지 명령 85-1호. [사진 미국국가안보문서보관소]

다만 위기 이후의 움직임은 평가할만 하다. 레이건 대통령과 마가릿 대처 영국 총리는 에이블 아처 훈련 기간 이런 위기가 있었다는 보고에 경악하면서 즉시 소련의 오해와 오판을 예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소련 지도부도 위기 재발 방지를 위해 미국과 핵무기 감축협상이 시급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1983년 전쟁 공포는 양 진영으로 하여금 냉전을 끝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이 점에서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KGB도 인간정보(휴민트)를 강화하는 등 라이언 작전의 문제점 보완에 적극 나섰다. 물리적 지표만으로 조기 경보하는 라이언 작전은 상대 지도자의 생각과 의중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등 정보의 불확실성이 크다는 문제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KGB는 동독 슈타지와 협의에 나서 1984년 8월 라이언 작전을 공동 수행하기로 합의했다. 슈타지는 서유럽과 나토본부에 자타가 공인하는 막강한 인간 정보자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 당시 핵전쟁 우려와 이에 따른 미·소 간 눈에 보이지 않는 오해와 정보 오류는 북핵 문제나 미·중 경쟁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참고할 만하다. 특히 미국의 선제공격 징후 판단을 위한 KGB의 292개 지표 관리는 북핵문제 관리에 벤치마킹할 요소가 있어 보인다. 라이언 작전은 정보가 정세에 종속될 경우 어떤 위험을 가져오는지도 보여 주었다. 이 같은 정보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은 백악관과 총리실 산하에 정보자문기구를 두고 있다. 이래저래 KGB의 라이언 작전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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