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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 백이면 백 비참" 종로 '산책자'로 거듭난 윤동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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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호 26면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종로 배회하던 청년 시인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 고갯마루에 있는 윤동주문학관. 윤동주는 대학 시절 이곳에서 하숙을 하며 ‘종로 산책자’로 지냈다. [사진 종로문화재단]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 고갯마루에 있는 윤동주문학관. 윤동주는 대학 시절 이곳에서 하숙을 하며 ‘종로 산책자’로 지냈다. [사진 종로문화재단]

종로구 청운동 3-100번지, 북악산 자락, 자하문 고갯마루 예전 ‘수도 가압장’ 자리에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수압을 높여 고지대로 수돗물을 보내던 장소에 그의 문학관이 들어섰다는 점이 이채롭다.

윤동주는 종로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가. 윤동주는 종로 서촌 주민이었다. 장소는 사람을 생성한다. 변방 북간도 출신의 소년 윤동주가 1938년 ‘경성’에 왔고, 종로를 왕래하면서 ‘모던 청년’, ‘도회의 청년’으로 다시 태어났다. 종로에 살던 시절, 윤동주는  ‘서시’를 비롯하여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썼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에는 ‘경성 청년’의 신체가 형성되는 과정의 고뇌가 스며 있다.

명동서 영화 보고 헌책방 순례도

윤동주가 전차를 타고 왕래했던 남대문통 1정목의 거리 풍경. 그는 총독부·경찰참고관 등을 지나치며 식민지 청년의 좌절을 체감한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윤동주가 전차를 타고 왕래했던 남대문통 1정목의 거리 풍경. 그는 총독부·경찰참고관 등을 지나치며 식민지 청년의 좌절을 체감한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북간도 용정에서 연희전문학교에 유학 온 윤동주는 1941년 4월부터 9월까지 종로 인왕산 밑의 누상동 9번지(지금 서촌 수성동계곡 입구)에서 하숙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차와 기차를 타고 등하교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도시와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고민했다. 그는 도시의 겉모습만을 훑어보는 구경꾼이 아니라 도시의 내부를 사유하고 분석하는 산책자가 되었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도시의 산책자와 구경꾼(또는 여행객)을 구분한 바 있다.

벤야민은 산책자와 구경꾼(Badaud) 또는 여행객을 동일한 주체로 보지 않았다. 산책자는 도시 공간에서 개성을 확보하고 있는 자이며, 여행객 또는 구경꾼은 외부세계에 열광하고 도취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경꾼은 자신의 개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개성을 외부에 빼앗겨 버린다.(『아케이드 프로젝트』,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5)

윤동주도 벤야민과 같이 도회인 산책자와 구경꾼 또는 여행객의 차이를 구분하면서 ‘경성 산책자’로서의 개성을 키워갔다. 그는 장소를 냉철하게 관찰하면서 자신의 내면과 개성을 동시에 투시하고 성찰하는 산책자이고자 했다. 그는 ‘경성’의 속도와 일상과 대중, 장소의 정치성을 치밀하게 읽어냈다.

윤동주는 등교하기 위해 누상동 하숙집에서 효자정역까지 걸어와서 전차를 탄다. 그리고 전차 안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자신을 본다.

젊은이들 낯짝이란 도무지 말씀이 아니다. 열이면 열이 다 우수 그것이요 백이면 백이 다 비참 그것이다. 이들에게 웃음이란 가물에 콩싹이다. 필경 귀여우리라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의 얼굴이란 너무나 창백하다. 내 상도 필연코 그 꼴일텐데 내 눈으로 그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윤동주, ‘종시’에서)

윤동주가 하굣길에 자주 들러 책을 읽고 사기도 했던 충무로 책방 지성당.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윤동주가 하굣길에 자주 들러 책을 읽고 사기도 했던 충무로 책방 지성당.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이 글을 쓸 당시 종로 전차에서 본 대중은 대부분 우수에 비참하고 창백하다. 윤동주는 노동자, 사무원, 학생 등 대중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찰했다. 대중과 산책자는 상호작용한다. 때로는 대중이 산책자에게 하나의 새로운 풍경과 배경이 된다. 이를 통해 산책자는 자신의 개성과 처지를 확인한다. 이를 통해 또 세상을 관찰하고 발견한다. 윤동주가 식민지 자본주의 경성의 모던 청년으로 태어나는 과정은 이런 분열과 고통의 과정이었다.

성벽이 끊어지는 곳에 총독부, 도청, 무슨 참고관, 체신국, 신문사, 소방조, 무슨 주식회사, 부청, 양복점, 고물상 등 나란히 하고 연달아 오다가 아이스케이크 간판에 눈이 잠깐 머무는데 이놈을 눈 내린 겨울에 빈집을 지키는 꼴이라든가 제 신분에 맞지 않는 가게를 지키는 꼴을 살짝 필름에 올리어 본달 것 같으면 한 폭의 고등 풍자만화가 될 터인데, 하고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하기로 한다. (윤동주, ‘종시’, 1941)

그가 탄 전차는 효자동에서 출발해서 경성역까지 연결하는 노선이었다. 효자정역에서 출발한 뒤 진명여고~통의정~(영추문)~적선정~총독부전~체신국전~광화문~부청전~태평통2~남대문역~남대문통5~경성역으로 향했다. 이 효자동 전차선은 1917년 조선총독부 신청사 공사를 위해 놓이기 시작해서 1927년 효자동까지 복선으로 부설되었는데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사택, 총독부 관사 등을 잇는 노선이었다. 이 노선은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 경기도청, 경찰참고관, 체신국, 신문사(동아, 조선,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 등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핵심 관청과 언론사를 두루 통과하였다. 윤동주는 매일 이 앞을 지나면서 위압감과 위화감, 참담함 등 복잡한 감정을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경찰 참고관’을 명명할 때는 ‘무슨 참고관’이라고 ‘경찰’을 무화시켜버렸다. 지금의 미국대사관 자리에 있던 경찰참고관은 독립군에게서 빼앗은 소총 등 노획물을 전시하는 등 경찰조직을 선전 홍보하는 시설이었다.

서울시청을 지나 남대문까지 태평통은 불결한 고물상이 즐비한 어수선한 거리였다. 윤동주는 ‘한 폭의 고등 풍자만화’와 같은 조선의 거리를 지나며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윤동주, 책 800권 사 모은 독서광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그러는 사이 전차는 경성역에 도착하고 그는 거기서 기차를 갈아타고 경의선 방향으로 출발하여 서소문 간이역-아현역-신촌역에 도착한다. 1930년에 경성역~서소문~아현~신촌~연희~서강~공덕~미생정~원정~용산을 잇는 교외순환선이 개통되어 신촌과 아현리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윤동주는 “내 차에도 신경행, 북경행, 남경행을 달고 싶다. 세계일주행이라고 달고 싶다. 아니 그보다 진정한 내 고향이 있다면 고향행을 달겠다”(‘종시’)며 이 기차가 계속 달려서 다른 세계로 그를 데려다 주기를 꿈꾼다. 그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주를 상상했다. 윤동주에게 기차와 정거장은 그의 삶이자 신체였으며 추억이었다. 외롭고 그리울 때 윤동주는 기차와 정거장을 떠올리곤 했다.

하학 후에는 기차편을 이용했었고,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들어와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지성당, 일한서방, 마루젠, 군서당 등. 신간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후유노야도(冬の宿)’나 남풍장(南風莊)이란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극장에 들르지 않으면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서 관훈동 헌책방을 다시 순례했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서점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된다. 이리하여 누상동 9번지로 돌아왔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함께 하숙했던 정병욱의 회고다. 윤동주의 하학길은 다시 기차를 타고 경성역에 내린 뒤 전차를 타고 한국은행 앞에서 내려 모던보이처럼 본정을 산보하는 것이었다.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쇼핑도 했을 것이다. 주로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하고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살펴보고 음악다방에서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고, 중국집에서 백주를 마시기도 했다. 명치좌에서 영화도 보았다. 종로 인사동과 관훈동, 적선동의 헌책방을 순례하고 서촌 하숙집으로 귀가했다.

윤동주가 사 모은 책이 800권 정도였다니, 그의 독서력은 대단했으며 문학과 철학, 세계정세에 대한 이해가 깊고 넓었다. 그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다.

윤동주는 근대 도시의 전차와 기차, 화려한 상품, 정보와 지식, 예술과 유행 등을 통해 모던한 감수성을 충전하기도 하고, 식민지 자본주의의 욕망과 착취, 낙오한 도시민의 비참과 절망을 투시하는 비판적 산책자였다. 종로 누상동 9번지 하숙집에서 쓴 시  ‘돌아와 보는 밤’은 경성의 산책자로서 그의 감각과 사유를 보여준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빗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윤동주, ‘돌아와 보는 밤’(1941.6) 전문

6월 어느 날, 윤동주는 ‘경성’ 도회 청년 산책자로서 집에 돌아와 피로와 울분을 토로한다. 세상과 시대는 비에 젖고 어둠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은 분열과 혼란 속에서 능금처럼 익어갔다. 그는 ‘경성’과 종로에서 도회의 청년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곳은 윤동주에게 ‘영혼의 가압장’이었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정우택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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